국어평생교육 ＊ 우리말 배움터

바야흐로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고려말이었다.
한 여름을 맞이한 송도는 아침부터 더위에 헐떡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물론 짐승들까지도 기진맥진이었다.
그러한 삼복 더위 속에서도 바느질을 해야만 하는 한 과부가 있었다. 일찍이 남편을 잃은 이 과부는 끼니를 잇기 위해선 여자로서 별 수 없었다.
모두 더위에 안절부절 못하는 터라 과부도 별 수 없었다.
"원! 더위도···."
과부는 더위를 참지 못하여 중얼거렸다.
늙어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그녀는 일찍이 전장터에서 남편을 여의자 혼자 수절을 하였다. 그러한 그녀는 아무리 더워도 여간해서는 문을 열지 않았다. 못된 사내들이 안 그래도 과부를 넘겨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따라 더위는 푹푹 찌는 것이다. 문을 닫고 조금만 앉아 있다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우선 뒷문을 열었다. 그러나 지독한 더위 속에 뒷문을 열었다고 시원할 리 없었다. 앞문을 마저 열었다.
그러나 날은 여전히 덥기만 했다. 더구나 여자는 속옷부터 꼭꼭 다져 입고 저고리도 치마까지 처지는 것을 입었으니 더울 밖에 없었다.
속옷은 벌써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견디다 못한 과부는 옷을 벗어부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더위에 옷을 벗는데 흉볼 사람은 없겠지. 그녀는 거의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새삼스레 풍만한 자기 육체를 느끼는 것이었다. 스스로 자기의 처절한 운명을 한탄했다. 밀어 놓았던 일거리를 다시 집으면서도 그녀의 신세타령은 그칠 줄 몰랐다.

애고 내 팔자야 내팔자야
일찍부터 홀모되어
하루종일 왼종일을
가나오나 혼자있어
답답하고 서럽도다
남들한느 사랑한번
재미있게 못해보고
아침부터 삯바느질
밤중까지 가는구나
애고 애고 애고
찌쁘등한 이내몸아
귀찮구나 이바느질
·······

과부의 외로운 신세타령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녀는 의지할 곳 없는 홀몸으로 삯바느질로 연명해 나가는 신세가 생각할수록 슬프기만 하였다.
그런데 이 때, 그 과부는 시원스레 간질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등이 딱딱하고 까만 딱정벌레였다. 시름에 잠긴 채 바느질 손을 움직이는 과부의 살찐 허벅지를 근질거리며 벌레는 등으로 기어 올라갔다. 엉금엉금 기어오르던 벌레는 이윽고 어깨에 올라 앉았다. 적적하기만 하던 과부는 이 벌레의 간지럼이 즐거웠다. 억지로 간지러움을 참으며 과부는 벌레가 어디로 갈까 하고 두고 보았다.
벌레는 어깨를 타고는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와 손등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작기는 했으나 제법 다구져 보였다. 다시 둥이나 어깨 위로 올라가 자기를 간지려 주었으면 하고 과부는 생각하였으나 얄궃게도 그럴 생각을 없는 듯 다시 손등에서 손가락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벌레를 주목하던 과부는 깜짝 놀랐다. 과부가 쥐고 있던 바늘을 냉큼 먹어치는 것이 아닌가. 괴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는 벌레를 동정하였다. 오죽이나 배가 고프면 조그만 벌레가 바늘을 다 집어 삼킬까 하고 측은한 생각을 하였다.
"벌레가 바늘을 삼키다니!"
아무래도 의아한 일이긴 했다. 과부는 다시 바늘 쌈지에서 바늘을 뽑아서 벌레 입에 갖다 대었다. 역시 그 바늘도 벌레의 먹이가 되었다.
"참 별일 다 보겠네, 정말."
과부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것은 별일 뿐이 아닌 기상 천외의 일이었다. 생전가야 벌레가 쇠를 먹고 산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까만 등을 한 그 벌레는 그날부터 쉬지 않고 과부의 방을 드나들며 쌈지의 바늘 뿐 아니라 가위와 문고리, 식기, 요강까지 쇠붙이로 된 것이면 닥치는 대로 삼켜 버렸다. 그러는 동안 조그맣던 벌레는 점점 커지다가 어느덧 큰 강아지만큼이나 커지는 것이었다. 심심풀이로 그냥 놔두었던 벌레가 큰 괴물이 되어 이대로 가다간 집안 살림이 온통 망가질 것 같았다. 한편으론 무섭기도 했고 소름이 오싹오싹 끼치기도 했다. 조용하기만 하던 과부의 집에서 누구를 상대로 한 말인지 큰 소리까지 들렸다.
"나가! 어서 나가라! 이 망할 놈의 괴물딱지야."
그렇게 소리친다고 호락호락 집을 나갈 괴물은 아니었다. 쇠붙이로 된 기물을 모두 삼킨 괴물은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커다란 밥솥마저 먹어 치웠다.
이렇게 과부의 집에 소동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 송도에는 한 무당이 퍼뜨린 다음과 같은 속요가 널리 퍼졌다.
화생(火生)은 목(木)이요
목생(木生)은 토(土)라
태초(太初)에 건국할 때
토(土)에서 거목(居木)이나서
거목에서 볼꽃이 있었거늘
시절은 불운해서
목생은 화(火)가 아니라
지금은 목(木)을 이기는
금생토(金生土)라
쇠붙이를 먹는 괴이한 짐승이 나타났으니
목은 넘어지도다
나라의 큰 나무는
쇠붙이로 해서 넘어지도다

말세가 되면 무당들과 같은 유언비어가 나돈다는 말과 같이 이러한 속요는 꼬리에 꼬리를 무고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속요의 가사처럼 현실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런 괴물이 그들에게 나타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그런데 새까만 괴물은 과부집 쇠붙이가 동이 나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니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송도 장안의 어느 집인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리저리 치달으며 눈에 띠는 쇠붙이를 믹무가내로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뭐라고 그 괴물이 지금은 우리 집으로 온다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장안은 온통 아우성이었다. 섣불리 방어를 하다가는 오히려 몸을 상하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괴물이 한 번 지나간 마을은 온통 밥지어 먹을 솥까지 빼앗긴 채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괴물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사람들이 방어할 여유도 주지 않고 덤벼들어 사람들은 자기의 몸 하나 감추고 도망하기에 바빴다.
이런 식으로 송도 장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다리가 무너지는가하면 멀쩡하던 집이 무너지고 또 종루에 높직이 매달린 커다란 종마저도 괴물의 먹이로 희생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관가에 들어가자 분수에 넘치는 고대광실에서 굴과 계집으로 시간을 일삼던 대감은 포도대장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었다. 이날 이때까지 무엇을 하며 그까짓 괴물로 민심을 어지럽히느냐고 추상같은 호령이 내렸다.
포도대장은 등에 식은 땀만이 흐를 뿐, 이 괴물딱지를 어찌 처치를 할까 하는 데 대한 것은 속수무책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그러하오나 아무리 칼을 휘두른다고 해도 괴물은 쇠붙이를 먹는 놈이라 몇 백만 군사가 칼을 휘두른들 소용이 없는 줄로 아옵니다."
속수무책을 호소하는 포도대장에겐 다시 불호령이 내렸다.
"어서 썩 나가 괴물을 잡아 들이지 못할까! 칼로 안 된다면 사방에서 불을 질러 잡아 오너라."
포도대장은 그 길로 송도에 있는 다른 군사를 풀어 거리로 데리고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몰려 나와 과연 이 많은 군사와 포도대장이 전대 미문의 괴물을 잡을 수 있을까 하며 마음을 조리고 지켜 보았다. 그 사람 중에는 잡을 수 있다는둥 없다는둥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결론적인 것은 두고 봐야 알 일이나 그 귀추엔 회의적인 쪽이 더 많았다.
포도대장은 백성들에게서 모든 장작을 전부 걷어 들여 길목마다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온 거리는 불바다가 되다시피 활활 타올랐다.
이렇게 만반 태세를 갖추고 있는 동안 괴물은 여전히 이리저리 돌아 다니며 쇠붙이를 찾았다. 골목마다 일어나는 불길은 천지를 진동시키며 타올라갔으니 포도대장 이하 포졸들은 타오르는 불길을 지켜보며 모두들 칼을 뽑아 쥐고 있었다. 삼복더위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실로 뜨거운 열탕가도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쇠를 먹는 괴물을 향하여 칼을 휘두른다는 일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 하는 것을 모르는 포도대장이 아니었으나 다른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그였다.
이렇게 잔뜩 긴장되어 있는 그들 앞에 드디어 괴물은 나타났다. 구경하던 사람들과 군사들은 아우성이었다. 포도대장은 무서워 말고 어서 칼을 휘두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괴물은 치닫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겁에 질린 군사들의 함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몰려 도망쳐 다녔다.
기물은 하찮은 군사들은 아랑곳없이 손에 쥐고 있던 칼을 잘 만났다는 듯이 삼켜버리며 여유 있는 발걸음을 옮겼다. 제법 칼을 휘둘러대던 포도대장도 어쩔 수 없이 괴물의 먹이로서 장검을 바쳐야만 했다. 군사들도 이젠 모두 달아나 보이지 않았고 포도대장 또한 보이지 낳았다. 천지가 제것인양 날뛰는 괴물만이 남았다. 그러자 괴물은 타오르는 불길을 만났다. 그러나 그까짓 게 무슨 문제가 될 것이냐. 괴물은 어렵지 않게 불길을 건너뛰는 것이었다. 그렇게 날로 그 기운이 넘쳐 나는 괴물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관가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두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건드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수만금을 걸고 괴물을 잡는 자에겐 상금을 준다고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다만 이 괴물의 이름이 불가사리로 불러졌으며 그저 천명만 기다릴 뿐이었다.
어느 과부의 허벅다리를 타고 기어올라 바늘을 삼켜 먹던 괴물 불가사리의 행패는 끊임없었다. 세월은 흘러 고려국은 멸망하고야 말았다. 어느 무당이 지껄인 말대로 쇠붙이를 먹는 불가사리는 망국의 징조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민간에서는 그 후 `송도 말년의 불가사리`라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아무도 손을 쓸 수 없이 못된 행패만 부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불가사리의 모양은 마치 곰과 흡사하며 코는 코끼리의 코, 물소의 눈, 소의 꼬리, 범의 다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한다.

( 朴盧澹 ≪韓國의 傳設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