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백석(白石)은 1936년 시집 ‘사슴’을 자비로 발간하면서 조선 문단의 눈길을 한몸에 받게 된다. 우리말의 멋과 맛을 주옥 같이 담아낸 이 시집은 100부만 찍은 탓에 금세 동이 났다.
시인 윤동주마저 이 시집을 구할 길 없어 직접 손으로 베껴 간직했다고 한다. 시인 신경림(申庚林)은 6·25전쟁 후 서울 동대문 헌책방에서 이 시집을 찾아냈을 때의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실린 시는 40편이 못 됐지만 그 감동은 열 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보다 더한 것이었다. 읽고 또 읽었다. ‘사슴’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 구실을 했다”고 되새기기도 했다.
백석의 시는 고향인 평북 정주의 토속 방언을 사용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냈다는 평을 받는다. “남쪽엔 정지용, 북쪽엔 백석”이라고도 한다. 같은 고향 선배인 김소월이 한과 절규를 쏟아낸 반면 백석은 내면의 피울음을 견디고 견뎌 내면서 냉담하고 견고한 시(詩)의 성을 쌓아갔다. 당대의 미남으로 손꼽혔던 그는 결벽증이 유난해 전차 손잡이도 손수건으로 감은 뒤 잡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물결 머리를 휘날리며 걸을 때는 광화문이 파리의 거리처럼 환해진다고 김기림은 썼다.
이런 ‘모던 보이’ 백석에게 연애담이 없을 수 없다. 백석과의 절절한 사랑을 지난 95년 ‘내사랑 백석’이란 책으로 펴낸 김자야가 대표적이다. 나중에 서울의 유명한 음식점 대원각의 주인이 된 ‘자야’(子夜·본명 김영한)는 이 음식점을 법정(法頂) 스님에게 기부해 길상사로 만드는가 하면 ‘백석 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조선일보 사진부장을 역임했던 백석은 조선일보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靑山)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자신도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타고난 방랑벽은 어쩔 수 없었던지 그는 만주로 올라가 갖은 고생을 자청하면서 ‘파란 혼불’처럼 떠돌았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고당 조만식의 영어·러시아어 통역으로 활동하다 분단과 함께 북에 남게 되면서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지워져 버렸다.
백석은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끝내 협동농장으로 추방돼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석이 다시 우리 문단에 복귀한 것은 1988년 월북문인들에 대한 해금조치가 있고 나서지만 일반에는 여전히 낯선 존재였다. 이번 대입 수능의 정답 시비로 그의 시가 일거에 널리 알려지고 시중에 때 아닌 시 해석 논란이 일고 있지만 정작 그에게 정답을 물어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