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50),휘, 도, 자 원정, 시호, 장헌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 민씨 소생.비 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1408년(태종
8)충녕군에 봉군, 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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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후 정치, 경제 ,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유교 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업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 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또한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 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1420년에 설치된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 왕과 세자에 대한 학문적인 자문과 교육과 각종
학술 연구, 서적 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여
의정부의 독주를 견제했고,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최항 등 장년층 |
의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자문, 왕실 교육, 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그리고 궁내에 정음청을 설치,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으로 하여금 43년(세종
25)한글을 창제하게 하고 46년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여
반포하는 한편 정음청을 두어 유교 전적. 음운서 등의 국문 출간을 담당하게 했으며,
학문의 장려에 힘쓰면서 "효행록", "삼강행실", "오례의", "자치통감훈의",
"치평요람", "용비어천가", "고려사", "역대 병요",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 각종 서적을 편찬하게 했다. 또한 이천에게 명하여
경인자, 갑인자, 병진자 등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그중에서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유명한 활자이다.
초기에는 억불책을 써서 5교 양종을 선종과 교종의 2종으로 통합하여 각 18개
사찰만 인정하고 경행을 금지했으나, 말년에는 궁중에 내불당을 짓고 승과제도, 경해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여 25년 관습도감을 설치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박연에게 명하여 아악기를 개조하여 고래의 아악,
당악, 향악의 모든 악기, 악곡, 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게 했으며, "정대업",
"보태평" 등 저명한 악곡을 제작하게 하였다.
또한 실록을 보관하고자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에 4대 사고를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업적은 42년 이천, 장영실로 하여금 우량을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도록 했고,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김담, 이순지 등을 시켜 중국 원나라의 수시력, 명나라의 대통력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빌어 역서인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했고, 천문, 역법, 의상 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을 이순지가 펴냈다.
경제, 사회 정책면은 36년 공법상정소를 설치하고 각 도의 토지를 비척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했으나 결함이 많았으므로 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풍흉에 따라 연분 9등법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6등법에 의한 수등이척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마다 측량하여 양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그리고 의창, 의료제도, 금부삼복법을
제정했고, 노비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했고, 사형을 금하도록 했다.
대외정책면에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처녀진헌을 폐지하는 한편, 당나라에 보내던 금, 은의
조공물을 폐지하고 마, 포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과의 관계는 무력을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존 양변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 이천 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곳에 사민정책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정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일보고는 19년(세종1)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소 사다모리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26년 삼포를 개항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조약을 체결하게 하여 1년 동안에 입항할 수 있는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했고, 세사미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름인데 처음에는 광주에 있었으나,
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겼다.
세종조는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길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나아가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에 기본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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