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이 넘어서도 원기 있는 활동을 했던 수필가·시인·영문학자 금아(琴兒) 피천득 (皮千得·93) 선생이 폐렴 증세로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다. 지난달 24일부터 폐렴으로 6일 동안 입원했던 선생은 상태 악화로 지난 3일 다시 입원해 폐에 생긴 물을 뽑아내는 치료를 받았다. 병원측은 “호흡 곤란 등 위급한 징후는 없으나 워낙 고령이라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5일 문병차 병원을 찾은 기자에게 금아 선생은 “어떻게 알고 왔느냐”며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랬는데…. 그런데 나보다는 구상(具常) 선생이나 윤석중(尹石重) 선생이 더 편찮으시다는데 그곳을 먼저 찾아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태어날 때는 자신도 모르게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자신이 죽을 때를) 안단 말야. 고통없이 잘 죽어야 할 텐데. 옛이야기에 바둑을 두다 죽었다는 사람도 있었다는데, 그렇게 죽는 게 제일 좋은 거 아냐? ‘왜 바둑을 안 두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이 상대방이 죽어 있더란 거야.”
병상을 지키던 제자 석경징 서울대 명예교수는 “선생님, 그런 말씀 마시고 하루빨리 훌훌 털고 일어나셔야죠”라고 스승의 손을 꼭 잡았다.
금아 선생의 부인(86)도 병환 탓에 서울 반포의 집에 별도의 간병인을 둘 정도여서 남편의 병상을 지키지는 못하고 있다. 대신 이 병원 소아과 의사인 차남 수영(守英)씨가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장남 세영(世英)씨는 캐나다에, 장녀 서영(瑞英·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씨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김성구 샘터사 대표는 “유명 작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선생은 장식품 하나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왔다”며 “그동안 산책과 독서·음악감상 등으로 소일하고 지내셨다”고 말했다.
금아 선생은 심명호 석경징씨 등 서울대 영문과 제자들을 집으로 초청해 식사를 하기도 하고, 수필집 ‘인연’ 등 애독자 초청 모임에도 참석하는 등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 열기 때는 시 ‘붉은 악마’를 지어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붉은 악마들의/ 끓는 피/ 슛! 슛! 슛 볼이/ 적의 문을 부수는/ 저 아우성!/ 미쳤다. 미쳤다/ 다들 미쳤다/ 미치지 않은 사람은/ 정말 미친 사람이다’(‘붉은 악마’)
금아 선생의 담백하고 소박한 삶은 수필집 ‘인연’에 실린 글 ‘만년(晩年)’을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늙은 아내 탓을 하지만 기름 때는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분에 넘치는 노릇이다. 그리고 긴긴 시간을 혼자서 가질 수 있는 사치가 있다. 젊어서 읽었던 ‘좁은 문’ 같은 소설을 다시 읽어도 보고 오래된 전축으로 쇼팽을 듣기도 한다.…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