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우리 창작 동요의 모습을 살피다 보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 창작 동요가 일본 7·5조 창가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이다. 창작동요가 구전 동요가 지니고 있던 생명력에 좀더 젖줄을 댔더라면 우리 동요의 모습은 좀더 생동감 있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눈물주의 동요의 범람 속에서 ‘날대가리 무 첨지’ 같은 작품을 보는 감회는 그래서 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을 지은 정열모(1895∼1967)는 동요시를 쓴 시인으로보다 한글학자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충북 보은생으로 조선어강습원, 경성 제일고보 교원 양성소를 거쳐 일본 와세대 대학 일본어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서울과 김천 등지에서 교원 노릇을 했다. 1942년 조선어 학회 수난으로 검거된 바 있고 해방 이듬해에는 국학전문학교 교장, 숙명여대 교수, 홍익대학 초대 학장을 지냈다. 1949년 한글학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동란 때 납북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자료에 보면 그는 과학원 언어학연구실 교수(1958년)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상무위원(1961년 5월)을 지낸 것으로 나와 있다.
정열모는 주시경의 학통을 이어받아 국어 연구에 몰두한 학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러 편의 동요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한 때 재직한 김천 고등보통학교 교가는 그가 지은 가사에 현제명이 곡을 붙인 것이다. 우리말을 연구하는 학자가 우리말로 된 동요시를 썼다는 것은 한편으론 자연스럽고 귀한 일로 보인다. 그런 예가 그리 흔치는 않기 때문이다.
‘날대가리 무 첨지’에서 우선 드러나는 것은 해학성이다. 아이들은 어떤 이의 모습이 저희들과 다르거나 우습거나 하면 영락없이 놀려댄다. 이 동요 속 시적 화자에는 그런 짓궂은 아이의 목소리가 그대로 녹아 들어있다. 추운 날씨를 “에이그 추워 벙거지”라고 눙치는 말법부터 예사롭지 않다. 놋대접에 담겨있는 동치미를 “날대가리 무 첨지”라고 호명할 때 전해져 오는 말의 재미는 더할 나위가 없다. 동치미는 그냥 먹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추운 날 알몸뚱이로 나앉은 대머리 첨지를 연상시킨다. 그런 재미있는 연상이 경쾌한 운율에 실려 독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웃음을 던진다.
‘날대가리 무 첨지’는 아무래도 우리 구전동요 전통에 많이 기대어 있다. 구전동요가 지니는 ‘날 것 그대로의 웃음’을 하나도 잃지 않고 고스란히 잇고 있는 작품이다. 요즘 동시인들이 간혹 호들갑스럽게 지어내는 그런 억지 웃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보약 같은 웃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