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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른 이 177770484 명
깁고 더함 200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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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웅 한글학회 이사장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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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뫼 허웅 선생은 우리말글 사랑에 평생을 바친 꼿꼿하고 탁월한 학자이자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1918년 경남 김해에서 난 선생은 동래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국어 연구에 뜻을 품고 38년 당시 외솔 최현배 선생이 몸담고 있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외솔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검거되자 그는 1년 만에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독학을 시작한다.
당시는 일제가 이른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국으로 대륙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문화통치 정책을 거둬들이고 국가 차원의 전쟁동원 체제 확립과 민족말살 정책을 본격화한 시기였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그 어느 때보다 제약받고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로 변절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선생은 40년부터 3년 가까이 폐침윤으로 고생하면서도 독학으로 15세기 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45년 해방과 함께 김해에서 한글 강습소를 열어 우리말과 글을 계몽·보급했으며, 53년부터 부산대·성균관대·연세대·서울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어학 발전과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또 이 시기에 국어심의회 한글분과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줄곧 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60년 한글학회 이사로 선임돼 70년 이사장을 맡은 이후 운명하기까지 33년 동안 국어학과 한글 발전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선생은 평생 우리말글을 갈고 닦아 한힌샘, 주시경, 최현배 선생의 대를 이어 국어학계의 거장으로 존경을 받았다. 주시경 선생이 국어학의 주춧돌을 놓고 최현배 선생이 집을 지었다면 허웅 선생은 그 집을 더욱 가다듬고 보수했다고 할 수 있다. 저서 24권, 주요 논문만도 64편에 이른다.
<주해 용비어천가>(55)는 용비어천가의 낱말과 말본, 역사적 사실을 상세하게 밝힌 책이며, <국어음운론>(58)은 국내 최초로 시도된 국어음운론에 대한 공시·통시적 기술이다. <중세국어 연구>(63), <우리 옛말본-15세기 국어형태론>(75), <언어학-그 대상과 방법>(81), <국어학-우리말의 오늘, 어제>(83), <16세기 우리 옛말본>(89),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95), <20세기 우리말의 통어론>(99) 등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긴 수많은 저서는 국어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7권의 저서를 낼 만큼 성실하고 정열적인 연구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은 점은 후학들의 사표로 길이 남는다.
건국대 국문과 교수로 선친의 길을 따르고 있는 차남 원욱씨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겨울 등산을 즐겨서 산행 친구들이 ‘눈 쌓인 산’이란 뜻의 눈뫼라는 호를 지어주었는데, 아버지께서 매우 흡족해하셨다”고 회상했다.
2004/01/27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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