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내의 우리 동포 2,3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우리말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한국사를 바로 알아야 할 요즘 시기에 안타까운 일이죠.”
황유복(61·중국명 황여우푸)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계(우리의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중국내 한국사 연구의 권위자로 꼽힌다. 이 대학은 55개 소수민족을 연구하는 중국 최고의 대학으로 교수 2000여명에다 학생수가 1만 6000여명에 이른다. 황 교수는 이 대학에 한국문화연구소까지 직접 설립할 정도로 애착이 많다. 특히 그는 ‘베이징한국어학교’를 비롯,단둥·창춘·지린·내몽골·하이난 등 10곳에 분교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13일 국회의사당내의 후생관에서 그를 잠시 만났다. 그는 최근 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이사장 서영훈)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가차 방한했다가 이날 일행들과 함께 국회를 방문했던 것.한국어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묻자 그는 지나온,한많은 이력을 먼저 언급했다.
그는 독립투사의 유복자(遺腹子)였다. 경북 울진 출생인 그의 부친(황천수)은 1935년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주로 독립군에 대한 자금과 장비 조달 등 후원활동이었다. 그러던 1942년 9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곧바로 독살됐다. 이때 그의 부친 나이는 30대초반에 불과했다.
●독립투사의 유복자로 태어나 모친도 2살때 잃어 이듬해인 43년 2월 지린시에서 그는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두살되던 해에 모친까지 세상을 떠나 일찍 천애고아가 되는 불운을 한꺼번에 겪었다.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 잃은 슬픔과 난리통에 숨어 지내는 등 여러 어려움이 겹쳐 일찍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다. ”고 말끝을 흐렸다.
할머니 품에 어린 시절을 의지한 그는 지린시 조선족중학 6년과정을 마친 후인 61년 베이징으로 홀로 건너가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했다. 5년과정을 마친 직후 그는 이 대학에서 조교생활을 했다. 그러나 문화혁명으로 인해 졸지에 군(軍)농장 일과 사상교육을 받으며 전전긍긍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72년 대학이 정상화되면서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신입생 모집의 분위기를 틈타 조선어학과 개설의 필요성이 담긴 장문의 보고서를 학교측에 제출,조선학과가 첫 탄생되는 결실을 보았다. 평소 바라던 조선족 연구도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이같은 열정은 불행의 역사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픔도 많이 작용했다.
●틈틈이 모은 강의료로 첫 조선어학교 설립 논문발표도 계속됐다. 84년에는 미국의 코네티컷대학에 초청을 받아 해외특강에 나섰다. 이어 87년부터 1년간 하버드대 초청 교환교수로 재직하게 됐다. 이때 ‘미국·중국의 한인사회와 문화 비교연구’라는 주제로 미국 여러 지역을 순회강연했다. 88서울올림픽 국제학술대회때에는 중국의 조선족 학자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전국 10여개 대학에서 한국학생들과 만났다. 89년 귀국한 그는 틈틈이 모은 강의료(10만위안)로 ‘베이징조선어학교’를 설립했다.
“한·중 수교때 중국 정부는 관공서에 근무할 인력을 대부분 우리학교에서 차출할 정도로 우리 학교는 큰 역할을 했지요.사실 저는 미국이나 각국 특강때 한·중 수교를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표준한국말을 배워야 한다고 늘 강조했지요.” 92년 졸업생 450명 중 300여명이 취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지방도시에서 분교설립을 끈질기게 요청해 왔다. 그는 이 무렵 ‘조선어학교’를 ‘한국어학교’로 개명하면서 선양의 ‘세종한국어학교’ 등 지방으로 한국어교육을 확산시켰다.
●고구려사 문제 정확한 논거로 대처해야 중국정부의 최근 고구려사 역사왜곡과 관련,가급적 말을 아낀 그는 “한국사를 연구하는 중국학자들은 고구려사 (중국)편입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라면서 “(한국사를 잘 모르는)중국 동북사를 연구한 학자의 보고서에 의해 (문제가)불거진 만큼 이벤트성 행사보다는 한국학자들이 정확한 논거를 꾸준히 제시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그는 16일 오후 귀국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