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
|
 |
|
|
 |
 |
 |
 |
 |
 |
 |
|
 |
|
들른 이 174956270 명
깁고 더함 2007/12/28
|
|
 |
|
|
|
 |
|
|
|
|
한글학회 산증인 이강로씨의 첫 우리말사전 편찬기
|
“‘펴널’이 뭔지 알아?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데 이 말의 뜻을 아는 사람이 없는 거야. 대원군 등롱(燈籠)을 들던 아흔 살 노인한테 가서 물어봤더니 가르쳐 주더라고. 상투의 맨 아래 돌림을 ‘펴널’이라고 해요.”
1945년 10월 7일 스물일곱 살의 청년 이강로(李江魯·87)는 조선어학회(1949년 한글학회로 개칭)에 우리말 사전 편찬원으로 ‘취직’했다. 1921년 장지영, 권덕규 등이 창립한 조선어연구회를 모태로 설립된 조선어학회에는 광복 당일엔 회원이 아무도 없었다. 1942년 이극로(李克魯), 최현배(崔鉉培), 이희승(李熙昇) 등 33명의 회원들이 모두 일제에 구속됐고, 이윤재(李允在)와 한징(韓澄)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함흥 형무소에서 옥사했기 때문이다. 광복 후 감옥에서 풀려난 한글학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일제의 ‘고쿠고(國語) 상용’ 정책으로 잃어버린 우리말을 되찾아 살려내는 작업이었고, 그 작업의 결정판은 1947년 10월 첫 권으로 시작해 1957년 6권으로 완간된 ‘우리말 큰사전’이었다. 이 작업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이강로 한글학회 명예이사를 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최혜인(이화여대 3학년)씨가 만났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우리말 사전을 만든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1942년 회원들이 전부 붙들려 가면서 사전 편찬 중이던 원고를 압수당했지. 그걸 광복 직후 서울역 창고에서 찾아냈어. 함흥형무소에 갇혀 있던 회원들이 항고 중이었는데 증거서류로 이 원고들이 서울에 와 있었던 거야. 400자 원고지 200장 묶음으로 60권에 달하는 양이야. 원고를 보니까 ‘증거물 제 몇 호’라고 빨간 도장이 콱 찍혀 있더라고. 이 원고가 바탕이 됐지. 완간된 사전은 이 원고의 두 배가량 됐어.”
―한글학회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되셨어요?
“나는 집안이 일본인들한테 밉게 보여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어. 고향(충남 아산) 글방에서 한문을 공부했지. 이극로 선생이 나하고 항렬이 같은 어른이고 이희승 선생이 형님 뻘이 되는데, 1942년 2월쯤 조선어학회에서 일을 하겠다고 했지. 그런데 이극로 선생이 ‘우리가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젊은 사람이 잘못되면 안 되니 숨어 있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인천의 일본 사람 많은 곳에서 살다가 해방을 맞았어. 광복 후에 우리말 사전을 펴내려면 한문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일하게 됐지.”
―이희승, 최현배 선생님과 함께 사전을 만드셨겠군요.
“그분들은 자주 들르긴 했지만 직접 일을 하시진 않았어요. 최현배 선생은 나중에 미군정청 편수국장으로 가셨잖아. 이희승 어른은 서울대학 재건하는 일로 바쁘셨고. 내가 한글학회 들어갔을 때 직원은 이중화, 이극로, 정인승, 김병제, 정태진, 한갑수, 김원표, 안석제 그리고 나까지 9명이었어. 당시 49세였던 정인승 선생이 사전편찬위원장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
―우리말 단어를 풀이하면서 어려운 일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똥을 ‘싸다’와 ‘누다’가 어떻게 다른 것 같아? ‘아이가 똥 싸기 전에 먼저 누이라’고 하잖아. 싸다는 비정상적인 위치와 방법으로 배설하는 거고, 누다는 정상적인 거지. ‘똥을 쌀 놈’이라고는 욕해도 ‘똥을 눌 놈’이라고는 하지 않잖아. 내가 문제 하나 낼까? ‘다가와 앉아라’라고 할 때 ‘다가’의 기본형이 뭐야? 국문과니까 잘 알겠지?”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한글학회 사전 편찬원들 사이에서도 논의가 많았어. ‘다그다’와 ‘닥다’ 중에 어느 것으로 할지 말야. ‘다그다’가 되면 ‘다가’가 되지만 ‘닥다’가 되면 ‘닥아’가 되잖아. 9명이 둘러 앉아서 회의를 통해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됐어. 결국 ‘다그다’로 결정했지. 또 ‘팬잔례’라는 말 알아? ‘첫 딸 난 이가 친구들한테 졸려서 한 턱 내는 일’을 말하는 거요. 어째서 그러느냐는 몰라. 그냥 그렇게 쓰는 거니까 사전에 실은 거지. 우리말에 그런 게 많아요. 나이 서른이 된 사람이 장가를 못 갔는데 창피하니까 상투를 틀거든. 이런 상투를 ‘외자상투’라고 해요. 그런데 그 외자는 한자로 ‘외상(外上)’이라 쓰거든. ‘외상’이라 쓰면서 ‘외자’로 읽는 거지. 이것도 왜 그런지는 몰라. 그저 한국 사람 습관에 따라 그런 거야.”
―1957년에 6권으로 완성됐으니까 10년도 넘게 걸렸네요.
“해방 후에 종이가 있어, 잉크가 있어? 처음에 미국 록펠러 재단에서 4만5000달러를 기증해줬어. 돈으로 준 게 아니라 물자로 줬지. 기차 화차(貨車)로 열두 차인데 종이가 아홉 차였지. 잉크는 312통이고. 최현배 선생이 미군정청 편수국장으로 있으면서 슈바커라는 미국인이 상대였는데, 그 사람이 다리를 놓아줬지. 그런데 6·25전쟁 나고 종이고 잉크고 다 없어졌어. 전쟁 끝나고 미국에서 다시 3만9000달러 상당의 물자를 원조해줬어.”
―결국 미국 종이와 잉크로 우리말 사전을 만들게 된 셈이군요.
“그래요. 배로 싣고 와서 인천항에 도착했는데 얼마나 기쁘던지. 미국 컬럼비아 대학을 나온 정태진 선생이 영어를 잘해서 나와 함께 갔지. 그런데 낯선 사람이 종이를 만져보고 잉크통을 들여다보고 그래. 그때는 ‘쌩쌩이 판’이라고 해서 ‘쌩’ 하고 물건을 가져가 버리면 다 자기 것이 되거든. 종이야 무거우니까 들고 가기 어렵겠지만, 잉크통은 훔쳐갈 수도 있으니까 경계를 했지. 그런데 이 사람이 우리한테 묻더라고. ‘이걸로 무엇 하려고 그러오’라고 말야. 그래서 ‘사전’을 만들려고 한다고 했지. 그랬더니 이 사람이 ‘동업하자’고 하는 거야. 위조지폐를 ‘사전(私錢)’이라고 하잖아. 우리가 위조지폐를 만들려고 하는 걸로 생각했던 거지.”
―일상 생활 속 일본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일도 하셔야 했을 텐데요.
“그래요. 기차표 같은 사소한 것도 우리말로 바꿔야 했지. 기차표에 ‘게이조(京城) 요리(より) 부산(釜山)’이라고 돼 있었거든. 이걸 ‘서울부터 부산’으로 바꿨는데 내가 ‘서울에서 부산’이 맞지 않느냐고 최현배 선생한테 얘기했더니 맞다고 하시더군.”
―인터넷 외계어가 나돌 정도로 요즘은 우리말이 엄청 변했어요.
“말 교육은 안 하고 글자만 가지고 따지는 교육이 문제야.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 여사’를 어떻게 읽어? 육녀사야, 육여사야? 이론적으로는 ‘육녀사’가 맞아요. 그런데 다들 육 여사로 읽거든. 이왕 이렇게 됐으니 어떻게 하느냐고 하는데, 사람들이 많이 쓴다고 허용하기 시작하면 원칙은 없어져요. 또 많이 쓰고 있다는 걸 누가 증명하나? 일본 사람 이름 중에 ‘平平平平’이 있어. 우리는 ‘평평평평’ 외엔 다르게 읽을 재간이 없지. 그런데 일본어로는 ‘히라다이라 헤이베이’라고 다 다르게 읽어요. 날 생(生)자 한 글자도 17가지 방식으로 읽지. 우리는 글자에 집착하느라 우리말을 자꾸 잃어버리고 있어요. 요즘 백, 천을 온, 즈믄이라고 하는 사람 있나? 글자는 겨우 5000년 전에 생겼지만 말은 50만년 된 거요. 말 교육이 중요해요.”
2005/08/10 조선일보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