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사람과 사람끼리 뜻을 통하는 것이고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다. 말과 글의 소중함은 그것 없이 지내지 않고서는 쉽게 깨닫지 못한다. 일제 말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던 시대를 살던 사람만큼 절실하게 우리 말과 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한글을 만든 세종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유다.
새 조선왕조가 제대로 자리잡기까지는 반세기가 필요했다. 태종이 강화시킨 왕권의 터전 위에서 세종(1418~1450 재위)은 든든한 반석을 깔았다. 집현전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백성들을 위한 시책을 강구했다. 이를 알리기 위해 책을 펴냈고, 갑인자 등의 활자 제조를 직접 지휘했다. 이런 빼어난 자질과 관심의 결정체가 세종 25년(1443) 만든 한글이다.
자기네 글을 언제 어떻게 만들었다는 확실한 기록을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런데 세종은 창제 3년 뒤 펴낸 〈훈민정음〉에 이런 내용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백성들이 쉽게 익혀 쓰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라는 창제 의도가 너무도 분명하다.
또한 세종대에는 의례와 제도를 닦아 유교정치의 기틀을 세웠다. 유교 전적에서 역사 음운 지리 천문 의학 농서에 이르는 방대한 편찬 사업도 이뤘다.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농업, 의약기술, 음악, 법제가 정리되었으며 국토를 넓히고 세제를 개편해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세종의 관심은 세세한 분야까지 미쳤다. 관청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산전 30일 산후 100일의 출산 휴가를 주었고, 남편에게도 30일간 휴가를 장려했다. 지금부터 5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세종은 이 모든 것을 추진한 주체였다. 왕조 사회에서 모든 공적은 국왕에게 돌아가는 경향이 있으나 세종은 후대 정조처럼 스스로 뛰어난 역량을 지닌 학자였다. 유교정치에 대한 높은 소양이 있었고 역사·문화적 통찰력과 판단력을 갖추었다. 무엇보다 중국 문화에 경도되지 않는 주체성을 바탕으로 창조적 역량을 한데모아 추진한 힘과 신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에 남는 일은 아무에게나 기회가 오지 않는다. 능력이 출중해도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여건이 갖춰져도 빼어난 역량이 없으면 엮지 못한다. 새 국가 건설의 활력과 세종의 출중한 자질이 어울려 문화 성세를 이룰 수 있었다. 세종만의 업적이 아닌 국가 구성원 모두의 역량이 한데 모여 이룬 일이었다.
시대는 영웅을 낳고 영웅은 시대를 이끈다. 젊은 집현전 학자에게 보였던 뜨거운 배려와 어려운 이들에게 미쳤던 자상한 염려, 이런 사람됨이 사회적 여건과 조화를 이루어 민족 문화의 터전이 된 지성은 꽃을 피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