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시간 번갈아 가며 뉴스를 진행하다 보면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가며 살아야 해요. 그렇게 바쁜 중에 자투리 시간을 모아 뭔가를 연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사실 피곤해요. 하지만 이런 수고가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는 데 일조한다고 생각하면 `까짓 피곤함쯤…` 하게 됩니다."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KBS 아나운서실을 방문한 기자에게 박경희 한국어 연구부장은 인사 대신 이런 말로 입을 뗐다. 朴부장의 말이 아니어도 KBS 아나운서실은 충분히 분주해 보였다. 빽빽하게 자리잡은 책상과 그 사이를 한 손에 원고를 쥔 채 질주(?)하는 아나운서들.
항상 단정하고 차분한 자세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들의 보금자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처럼 날마다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 바쁜 생활 중에서도 86명이나 되는 KBS 아나운서들이 한결같이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하는 `과외활동`이 있다. 한국어 연구회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KBS 아나운서실에 한국어 연구회가 생긴 것은 1983년.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이다. 당시는 갓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방송들을 통폐합하면서 방송사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고 프로그램수도 늘어난 반면 이를 맡아 진행할 전문 아나운서들이 부족했던 시기였다. 제대로 된 언어교육을 받지 못한 인력이 투입됐고 이에 따라 방송언어 훼손 현상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말발로 먹고 사는` 아나운서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일까. 당시 아나운서실장이자 왕년의 명아나운서였던 전영우씨가 나서 이규환.김주환.김상준씨 등 동료들과 "방송이 일반인들의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방송언어의 오염을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다"며 `우리말 지킴이`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초기 활동은 단순했다. 아나운서실 한 켠에 전화를 개설해 놓고 시청자들의 우리말 궁금증을 풀어줬던 것.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했다.
"지금도 질문에 답변하면서 많이 배우지만 처음으로 전화를 개설해놓고 받았던 시청자들의 질문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진지한 학문적 연구를 병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시 6년차 아나운서였던 朴한국어연구부장의 회상이다.
이처럼 시청자들의 우리말 실력에 자극을 받은 한국어 연구회 소속 회원들은 이현복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박갑수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교수 등의 자문을 얻어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의 결과를 논문집을 통해 세상에 알리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이렇게 발간된 논문집은 무려 53권. 또 학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표준발음 대사전` `함께 가야 할 남북의 말과 글` 등도 펴냈다. 이중 `함께 가야 할…`은 우리의 표준어와 북한의 표준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민족 이질성 극복의 토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활발한 연구.출판 활동과 함께 아나운서실의 내부 교육도 엄격했다. 한 달에 한 번씩 2~3개의 프로그램을 선정해 아나운서의 우리말 사용을 함께 점검해보는 정기평가회를 개최한 것.
20년째 이어지며 이제는 전통으로 자리잡은 이 평가회에 대해선 모든 아나운서들이 "어휘 선택에서부터 발음에 이르기까지 어찌나 혹독하게 평가를 당했는지 가슴 속으로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고 입을 모을 정도다.
최근에는 이런 `자체검열`을 방송의 다른 영역으로도 확대하기 위해 탤런트.개그맨.리포터 등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어 연구회는 일반 국민들의 언어생활을 바로잡기 위한 활동도 활발하게 해왔다. KBS TV와 라디오를 통해 매일 전파를 타고 있는 `바른말 고운말`이 그 대표적인 성과물. 연구회는 이 방송 내용을 모아 최근 `바른말 고운말`이라는 책을 두번째로 펴냈다.
또 `바른말…`처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국군장병.소년원 수감생 등 자칫 거친 말을 사용하기 쉬운 이들을 상대로 `우리말 우리글 바로 쓰기 순회 강연` 등도 꾸준히 열어오고 있다.
한국어 연구회는 오는 15일 KBS 본관 2층 휴게실에서 원로 아나운서 20여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2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연구회는 그동안 순회강연을 통해 국어 순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날 행사 때 문화관광부로부터 감사패를 받는다. 우리말 지킴이를 자처하며 살아온 세월의 보상인 셈이다.
이명용 아나운서실장 겸 연구회장은 "사명감이 없었다면 결코 해낼 수 없었던 일이었다"며 "앞으로도 우리말의 규범을 지키고 전파하는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