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결국 인간들이 살아간 흔적이라고 한다면 인물사는 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분야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문중(門中)과 학파의 이해관계, 시대적 상황에 의해 전혀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특히 어떤 인물을 숭모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다른 인물을
깎아내리는 비교사적 필법(筆法)은 인물사를 빗나가게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리 민족사를 되돌아보면, 영광에 못지않게 오욕의
역사도 적지 않은데 그중에서 가장 마음 아픈 것이 너무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국의 문자를 빌려 쓴 데서
비롯된다. 글자란 단순히 글을 쓰는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중국의 문화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저들의 중화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역사를 살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한문이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글로 풀어 쓸 수 없음을 측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일찍이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명군(明君)이자, 현자(賢者)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한글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한 인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그 밑바닥에 깔고 이론을 전개한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최만리(崔萬理)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배운 역사에 의하면 그는 한글 창제에 반대했고, 이
사실로 ‘역사의 죄인’으로 비난받고 있다. 과연 그럴 만한 인물일까?
최만리는 역사적으로 비난받은 사람이었던 탓에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옛 문헌인 ‘국조방목(國朝榜目)’에서
그는 해주(海州) 최씨의 시조인 해동공자 최충(海東孔子 崔沖)의
12대 후손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최하(崔荷)였다고 한다. 그는 세종이
왕위에 등극한 1419년에 진사시 을과에 합격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본시 학문이 높았던 최만리는 과거 합격과 더불어 벼슬이 올라 집현전에
들어가 박사(博士)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이 되었고, 1439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잠시 임금의 곁을 떠났다가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이
되어 서울로 돌아와 세종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늙어서 고위직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고 청백리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무능하거나 부덕했던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443년이 저물어 갈 무렵, 세종은 오랜 노력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이듬해 연초가 되자 최만리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세종실록’ 갑자년(1444) 2월 20일(庚子)자에 실린 그의
상소문을 읽어보면 우리가 그의 진심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신하보다도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사업을 대단한
업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소의 첫머리에서 ‘한글을 창제한 왕의 업적이 지극히 신묘해
사리를 밝히고 지혜를 나타내심이 천고에 뛰어난 업적’이라고 경하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상소를 이어가면서 몇 가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첫째, 한글을 쓰노라면 한자를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장차 중국의 예법을 모르게 될 것이니
그 점이 걱정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최만리에게 두 가지 잘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한글을 쓰게 되면 한자를 쓰지 않게 되리라는 것은 생각이 지나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로부터 560년이 지난 지금도 한자가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고, 또 그들의 주장이 잘못됐다고만
볼 수 없다면, 당시 최만리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을 크게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또 한 가지, 그가 중국의 제도(예법)를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부분은 비난을 받을 만하다.
한글의 창제가 중국의 제도를 버리는 것도 아니려니와 중국의 제도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국가의 운명을 바꿔 놓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중국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걱정한 것은 그가 한때 총명을
잃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그런 식의 사고에 대해 최만리 혼자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 상소가 합소(合疏·여러 명이 연명한 상소)였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복룡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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