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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른 이 154508126 명
깁고 더함 200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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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 한글 파괴하는 외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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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간판·빌딩 이름·방송 프로 등 외국어 투성이… 우리 얼·정서 잃어
지난 1998년 타계한 최명희 씨는 ‘혼불’의 뛰어난 문학적 작품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말을 생생하게 살려 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는 작가이다. ‘혼불’에는 우리의 정서와 얼이 잔뜩 묻어나는 우리말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이는 최명희 씨가 평소 모국어인 우리말을 끔찍이 사랑한 데 따른 결과일 것이다.
최명희 씨는 모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기 때문에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 나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언어의 마술사로 통하는 최명희 씨조차 우리말의 절차탁마(切磋琢磨)를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말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너무나 걱정스럽다. 얼마 전 길을 가다가 대여섯 살 아이가 뭔가를 보고 ‘와우!’ 하며 크게 놀라는 장면을 목격했다. ‘와우’라면 영어 감탄사일 텐데 영어 감탄사까지도 일상적인 우리말로 둔갑해 대여섯 살 아이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대중가요의 제목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제목으로 쓰이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자연스러운 우리말의 일부인 양 돼 버렸다.
굳이 이런 예를 들지 않더라도 도심 길거리를 걸어가며 유심히 한번 관찰해 보라. 오래된 몇몇 건물은 한자어로 되어 있긴 하지만 최신식 고층 건물은 대부분 외래어로 되어 있다. 어떤 건 아예 외래어로도 볼 수 없는 외국어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우리말의 소리를 약간 변형시키거나, 또는 한글은 전혀 드러내지 않고 로마자(영어 알파벳)만 전면에 드러내서 외래어ㆍ외국어처럼 보이게 만든 경우도 있다. 아파트 이름이나 일반 가게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정감 있는 순 우리말로 된 이름을 찾아보는 건 가물에 콩 나듯 극히 적다. 현재 우리말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러할진대 우리말의 발전 및 미래는 기약하기 힘들다. 우리 모두의 자성, 반성이 필요하다.
이왕 건물로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건물의 이름으로 우리말 다듬기(국어 순화)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요즘 새로 지어지는 서양식 건물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 그러니까 통상적인 건물의 이름도 모두 외래어로 돼 있다. ‘빌딩’, ‘아파트’, ‘맨션’, ‘펜션’, ‘모텔’ 등이 그런 예이다. 이 가운데 ‘빌딩’은 본래 임대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서양식의 고층 건물을 가리켰으나 이젠 그저 ‘고층 건물’을 가리킨다. ‘고층 건물’의 다른 말일 뿐이다. 그리고 ‘아파트’는 일본에서 자의적으로 영어 ‘아파트먼트’의 앞부분을 떼 내서 새로 만들어 낸 말이다. 우리는 지금껏 무턱대고 일본식 영어를 써 온 셈이다.
한편 ‘맨션’의 경우, 영어에서는 ‘아주 큰 부자의 대저택’을 가리키지만 우리말에서는 ‘맨션아파트’의 줄인 말로서 ‘고급 아파트’를 가리키거나, ‘맨션 빌라’의 줄인 말로서 ‘다세대 주택’ 또는 ‘연립 주택’을 가리킨다. 그리고 ‘펜션’은 본래 ‘연금(年金)’의 뜻이었으나 요즘엔 ‘(고급) 민박’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런 뜻은 유럽에서 노인들이 여생을 연금을 활용한 민박 경영으로 보내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리고 ‘모텔’의 경우, 영어에서는 ‘자동차 여행자가 숙박하기에 편하도록 만들어 놓은 여관’을 가리키지만 우리말에서는 ‘여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턴 ‘숙박을 하지 않고 은밀히 성(性)을 즐기려는 남녀가 이용하는 숙박업소’를 뜻하는 ‘러브호텔’이란 말도 널리 쓰이고 있는데 이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러브호텔’은 일본에서 ‘동반 여관’의 뜻으로, 1973년경부터 써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지금껏 아무런 불편 없이 자연스럽게 써 온 외래어를 모두 다 순 우리말도 바꿔 쓰자는 건 아니다. 지나간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는 지나간 역사를 제대로 읽어 내야만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언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나간 역사를 모두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껏 아무런 불편 없이 자연스럽게 써 온 말까지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밝은 미래를 위하여 지나간 역사를 꼼꼼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말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말 사용의 현 실태도 꼼꼼하게 확인하여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비교적 최근에 쓰이기 시작한 외래어ㆍ외국어나 앞으로 들여와서 쓰게 될 외국어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자세로 가능하다？쉬운 우리말로 다듬어 쓰는 게 바람직하다. 하나의 예로써 건물 자체의 이름은 아니지만 건물과 관련된 외래어로 최근 들어 널리 쓰이고 있는 ‘스카이라운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고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는 으레 ‘스카이라운지’가 있다. 몇몇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연인이 사랑을 나누는 장소로 이곳이 자주 등장하게 되면서 요즘엔 일부 일반 연인들에게도 교제하거나 사랑을 고백하는 장소로 이곳이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서 ‘스카이라운지’는 ‘고층 건물의 맨 위층에 자리한 휴게실’을 가리킨다. ‘라운지’가 휴게실을 가리키니까 ‘하늘 가까운 곳에 있는 휴게실’이라는 뜻으로 ‘스카이라운지’를 쓰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영어권에서 ‘스카이라운지’는 ‘시내에서 헬리콥터에 승객을 태워 공항으로 보내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가 쓰고 있는 ‘스카이라운지’의 뜻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우리가 쓰는 ‘스카이라운지’는 일본에서 자의적으로 새로 만들어 쓰기 시작한 말이다. 그런 점에서 국립국어원은 가짜 영어인 ‘스카이라운지’를 ‘아주 높은 곳에 있는,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하늘쉼터’로 다듬어 쓰기로 했다. ‘스카이라운지’에 비하여 얼마나 쉽게 이해하여 쓸 수 있는 말인가?
‘랜드마크’나 ‘펜트하우스’도 건물과 관련하여 쓰이는 외래어이다. ‘랜드마크’의 경우에는, 이전에는 역사적 가치 때문에 보존할 만한 건축물을 가리켰다고 하나 이제는 주로 우리가 어디에 갔을 때 거기가 어디쯤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건물을 가리킨다. 쉽게 눈에 띄거나 누구나 알고 있어서 약속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는 건물을 말한다. “○○에서 보자”, “○○ 앞에서 보자”라고 할 때 ○○에 해당하는 게 바로 ‘랜드마크’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랜드마크’는 표지가 될 수 있는 또는 표지가 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표지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펜트하우스’는 아파트 분양을 광고하는 데서 자주 쓰이는 말인데 이 말은 본래 기계실로 이용되거나 물탱크가 있는 옥상 창고 또는 옥탑을 뜻하는 영어였다고 한다. 최근에는 아파트나 호텔 같은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매우 값비싼 주거 공간을 뜻하는 말로 더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펜트하우스’는 굳이 차용해 쓸 필요도 없는 외국어 또는 관심만 있으면 손쉽게 적절한 우리말로 바꾸어 쓸 수 있는 외래어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모두 다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고 가장 편리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의 우열을 따지는 것이 학문적으론 사실상 어불성설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말이 우리의 정서와 얼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우리말을 아끼고 보존하여 발전시켜 후손들에게 남겨야 할 의무와 함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말을 아끼고 보존하여 발전시키는 일의 하나가 바로 무턱대고 쓰는 외래어ㆍ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다듬어 쓰는 일이 아닐까?
박용찬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2006/10/09 주간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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