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나라당 박원홍 의원과 84명의 국회의원에 의해 한자교육진흥법이 입법 추진되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젊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열띤 토론이 전개되었다. 이 법안에 반대하는 대다수 네티즌들은 한글로만 표기하면 그것이 바로 국어라는 주장을 폈다. 한글로만 표기하면 곧 국어라고 보는 이들의 주장은 올바른 것일까?
한글이 곧 국어라면 ‘한글 이즈 더 베스트 그래핌 인 더 월드(Hangeul is the best grapheme in the world)’라는 한글표기도 국어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또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은 우리말에 있는 한자어들을 ‘文化的 情況’이라고 적으면 중국 글인 한자로 표기한 것이니까 중국어이지 한자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文化的 情況’이 중국어가 되려면 ‘웬흐어더 칭쾅’이라고 읽었을 때에 한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文化的 情況’을 ‘문화적 정황’이라고 읽는 사람은 지구상 어디를 뒤져봐도 한국어 사용자밖에 없다. 따라서 ‘문화적 정황’을 한글로 표기하든, 한자로 표기하든, 또는 로마자로 ‘Munhwajeog Jeonghwang’이라고 표기하든 ‘문화적 정황’은 바로 우리말인 것이다.
-국적도 없는 신조어 범람-
이렇게 문자와 언어를 별개로 보는 관점은 현대 언어학에서는 대단히 보편적이다. 문자가 곧 언어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글만으로 표기하는 것이 지고지선이라는 한글전용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주장들에 떠밀려 너무 경직된 문자정책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 국어교육의 현실은 한자를 가르치지 않고도 한자어를 잘 익히는 방법을 실험하고 있는 듯하다. ‘혁명(革命)’의 한자 훈(訓)은 ‘가죽’과 ‘목숨’인데, ‘혁명’의 의미에는 이들 한자의 훈이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한자어들이 국어에 상당수 있다는 그릇된 주장에 기초하여 국어시간에 한자교육을 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다. 그나마 경서(經書) 중심의 한문시간마저도 7차 교육과정에서는 선택으로 바뀌어 경우에 따라서는 한자를 한번도 교육받지 못한 채 졸업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런 교육제도로 인해 한자문맹이 되어버린 젊은 세대들이 사용하는 국어의 실상을 들여다볼 때, 어쩌면 외래어와 국적없는 신조어가 범람하는 우리 국어의 현주소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념이 흐려진 채,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사용하는 말들로 우리말은 멍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은 한자어와 토박이말이 어우러질 때 아름다울 수 있다. 우리말에서 개념들을 세분할 수 있는 것도 한자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이는 한자의 조어력(造語力)에 바탕한 것이다. 국어시간에 한자를 가르치지 않고 한자어를 가르치는 것은 이러한 조어력을 무사한 채 한자어를 박제(剝製)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박제된 한자어를 비집고 들어오는 말들은 국적 없는 신조어와 외래어, 외국어이다. 전문분야에서 무분별하게 외래어와 외국어를 사용하는 현상은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북한의 한자교육은 경서와 고문 중심의 한문교육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한자어 중심으로 한자교육을 철저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보다 앞서고 있다고 하겠다. 1966년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따라 68년부터 한자교육을 인민학교에서부터 부활한 후에 교육 내용은 한자어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노동신문을 분석해 보면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상당수의 한자어와 그 높은 수준에 놀라게 된다. 이는 한자어 중심의 한자교육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일찍이 우리말을 한글로만 표기할 것을 주장한 선각자들도 대개가 한자에 대단한 식견을 지녔을 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한문교육을 깊이 받았던 분들이다.
-우리말 알려면 한자 필요-
따라서 한자교육의 궁극적 목표점은 한글전용과도 맥이 닿아 있다. 우리 국어를 한글로만 표기하기 위해서는 깊이와 내실이 있는 한자교육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한자를 읽고 쓸 줄 알아서 우리말의 한자어를 한자로 표기할 수 있는 사람의 한글전용과 한자문맹의 한글전용은 천양지차(天壤之差)이기 때문이다. 한자문맹들의 한글전용은 우리말의 미래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