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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른 이 156046470 명
깁고 더함 200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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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규범, 현실과 조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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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법규와 현실이 서로 맞지 않은 경우를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할 때 보면 흔히 준법투쟁을 하여 교통이 혼잡해진다. 결국, 규정된 속도와 방법을 지키면 오히려 승객에게 불편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법규를 따르는 것과 교통 현실을 따르는 것,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할까? 아니면 현실에 맞게 법규를 다듬는 것이 바람직할까?
어문규범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자 ’의 ‘나래’와, ‘이 자리를 빌어 한 말씀드리자면’의 ‘빌어 ’는 각각 ‘날개’와 ‘빌려’의 비표준어로 되어 있다. 어문규범을 지키기 위해 이를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자’로 바꾸면 말맛이 있을까? ‘이 자리를 빌려 한 말씀드리자면’으로 고치면 낯설지는 않을까?
요즘 우리 주위에서는 이러한 예 때문에 어문 규범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어문규범을 고집하는 것은 우리말과 글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몇몇 현상 때문에 지난 세기 동안 이루어낸 국어의 질서를 다시 흩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는 본질상 시간과 공간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체계로 존재 한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들이 동일한 언어 체계를 가져야 원만 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래서 언어마다 어문규범이 필요하며, 국가는 어문규범을 제정, 보급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어문규범을 제정, 널리 보급하여 언어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노력해 왔지만,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규범과 언어 현실 사이에는 얼마 간의 차이가 있다.
한글맞춤법의 예를 살펴보자 ‘학굣길’이 바른 표기인 것처럼 ‘만둣국’ ‘북엇국’이 바른 표기이다. 그러나 어느 음식점에 가 보아도 차림표에 모두 ‘만두국’ ‘북어국’이다. 띄어쓰기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어’ ‘알타이 족’이 바른 표기지만 현실에서는 ‘프랑스어’ ‘알타이족’으로 붙여 쓴다. 규정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 주는 예다.
규범이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만약 이러한 괴리가 규범이 합리적이지 못한 데서 온 것이라면 규범을 다듬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어문규범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필요 하다. 외래어표기법의 예도 살펴보자. 기본적으로 외래어는 원어 발음에 충실하되, 국어의 말소리와 글자 체계에 맞게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영어의 [f]나 [v] 발음을 [ㅍ]이나 [ㅂ]으로 적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 발음을 표기할 한글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어에서 된소리로 들리는 소리를 외래어표기법에서는 된소리 대신 거센소리로 적고 있다. 프랑스의 수도가 ‘빠리’에 가깝게 발음되고 우리 글자 ‘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ㅍ’ 인 ‘파리’로 적도록 규정하고 있다. 규정을 정할 당시에는 인쇄 사정을 비롯,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쇄 여건이 나아져서 ‘ㅃ’과 같은 된소리를 피할 까닭이 없다.
그렇지만 몇 십년 동안 우리 눈에 익숙해 온 표기법을 크게 고친다는 것은 독서 습관에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다만, 국어처럼 파열음이 예사소리, 된소리, 거센소리의 세 체계(‘ㅂ,ㅃ ,ㅍ; ㄷ,ㄸ,ㅌ; ㄱ,ㄲ,ㅋ’ 등)를 가진 언어인 베트남어, 태국어 등에서는 당연히 된소리 표기도 허용해야 할 것이다.
전문분야 용어에는 외래어가 많다. 외국어를 고유어로 고쳐 받아 들이도록 노력해야 하겠지만, 모든 전문용어를 다 고쳐 받아들일 수는 없어 외래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문용어 가운데는 일반 생활 용어가 돼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정확한 원어 표기로 되돌리기 어려운 어휘가 많다.
예를 들어 화학에 쓰이는 ‘바이닐’ ‘프로페인’ ‘뷰테인’과 같은 표기는 전문용어로서 인정할 수 있지만, 이것을 생활 용어에까지 확대해서 ‘비닐봉투’ ‘프로판가스’ ‘부탄가스’를 ‘바이닐봉투’ ‘프로페인가스’ ‘뷰테인가스’로 바꾸어 쓰자고는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전문용어에 ‘비닐’ ‘프로판’ ‘부탄’을 강요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문규범은 우리의 의사소통을 가장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약속 이다. 따라서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약속을 지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국가는 국민들이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규정이 있다면, 이를 합리적으로 다듬어 제시해야 할 것이다.
[권재일 / 국립국어연구원 어문규범연구부장]
2003/12/24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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