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들말과 뚜껑 낱말책에 ‘긴치마’는 있지만 ‘긴바지-짧은바지’는 없습니다. ‘반(半)바지’하나는 있는데 ‘짧은바지’는 북녘에서만 쓰는 말이라고 적는군요. 하지만 우리는 바지를 입을 때 ‘긴바지’와 ‘짧은바지’도 입습니다. 우리는 흔히‘긴옷-짧은옷’이란 말도 쓰고 입말로도 굳었는데 우리네 낱말책에서 현실성을 살려 이런 말도 담아야 더 좋겠습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랜 지음-산적의 딸 로냐>(일과놀이, 1992)라는 책을 읽다가“가자! 옛날부터 난 야생말을 한 마리 붙잡고 싶었어”라는 대목을 만납니다. ‘야생말’이라는 낱말을 보고 낱말책을 살피니 ‘야생마(野生馬)’는 “⑴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란 말 ⑵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성질이 활달하고 거친 사람을 빗대는 말”로 풀이를 하고 ‘야생말’은 “=야생마”로만 풀이하는군요.
털빛이 흰 말을 가리키는 낱말은 어떠할까요. 보통 ‘백마(白馬)’라고 적으나 우리는‘흰말’이란 말을 아주 즐겨 써요. 털빛이 검은 말은 ‘검정말-검은말’이라 하고요. 말이면 그냥 ‘말’이라 할 때가 가장 좋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살아계실 때 ‘들사람 얼’을 말해 왔습니다.
요새 인기 끄는‘야인(野人)시대’라는 연속극의 그 ‘야인’을 ‘들사람’으로 다듬어서요. 이처럼 ‘야생마’도 ‘들말’로 담아낼 수도 있겠죠. ‘집개-들개, 집고양이-들고양이’라고 하듯 말이죠.
지하철에서 큰 사고가 터진 뒤 전철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비상시 문여는 방법’ 푯말을 곳곳에 붙였습니다. 그 푯말을 보면 서울 지하철에서는 “커버를 위로 올리고 손잡이를 앞으로 당기”라 하고, 부산 지하철에서는 “비상시 뚜껑을 열고 손잡이를 당기”라 합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똑같은 지하철이겠죠. 하지만 두 곳에서 쓰는 말은 다르군요. 물건은 같을 텐데 쓰는 말은 ‘커버(cover)’와 ‘뚜껑’으로 다릅니다. 우리 말에‘뚜껑-덮개-가리개’가 있으니 애써 ‘커버(cover)’라는 말을 들여와서 쓰지 않아도 좋겠다고 봅니다. 서울지하철공사에서 일하는 분들은 푯말 하나 붙일 때도 생각을 조금 더 해 주시면 고맙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