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른 이 182474219 명
  깁고 더함 2007/12/28
   
 
 
 
  언어, 사회 현상
R 발음이 별것인가

단지 영어의 ‘R’와 ‘L’ 발음을 잘 하게 하려는 이유 하나로 멀쩡한 아이들 혓바닥 끈을 잘라내는 수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교실 안에서만 유효할 뿐 밖에서는 여전히 무효한 영어 교육을 받은 이 땅의 젊은 엄마들이 영어 조기교육에 열 올리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요즘처럼 영어 의존도가 높아지는 세상에서 낙오하지 않는 아이를 만들기 위한 모성의 발로일 테니까. 그러나 아이들의 혀를 1㎝ 늘여 빼는 일로 승부를 거는 것은 조급하고 위험한 생각이다. 어릴수록 영어를 배우기 좋다는 말은, 아이들일수록 자연에 더 가까워 편견이나 고정관념, 두려움 같은 벽 없이 다른 언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혀 끈을 자를 뻔한 꼬마 시인이 생각난다. 다섯 살이 되도록 말을 잘 못하던 아이였다. 걱정이 된 엄마가 설소대 수술로 혀를 늘이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어른들은 한 마디로 말문이 늦게 트이는 것뿐이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 말은 맞았다. 겉으로는 성장의 조짐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 속에서 자라고 있던 예쁜 말과 생각이 나오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조금 더 기다려주자고 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하마터면 제 혀를 잡아 뺄 뻔한 아이도 있다. 혀 짧은 소리를 한다고 놀림을 받던 아이였다. 하루는 울면서 거울 앞에서 제 혀를 당기는 아이를 보고 엄마가 말했다. “괜찮아. 너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 영어를 잘 할 수 있을거야. 영어를 혀 꼬부라지는 소리라고 하잖아”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소리다. 하지만 그 아이는 엄마 말을 믿었다. 그 뒤로 혀를 잡아빼는 일 없이도 아이는 자라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그때 엄마가 법석을 떨며 걱정했다면 아이는 열등감을 갖고 자랐을지 모른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고,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말해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다섯 살 그 나이에는 칠판 없는 교실에서 놀이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말을 듣게 해야 한다. 요즘 엄마들은 한가한 소리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은 한 철의 나물이 아니라 오랜 세월 커가야 할 나무다. 나이테는 서두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달달 볶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말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기뻐하며 공을 주고받듯 그 말에 반응해주는 일이다.

이 좋은 봄날,아이 혀에 칼을 들이미는 대신 덕수궁으로 봄나들이 가자. 뜰 한가운데 정좌한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먼저 우리말을 고마워하게 하자. 버드나무 있거들랑 버들피리 불면서 ‘피리피리’ 노래하게 하고, 팔랑개비를 ‘핑그르르’ 돌리면서 달리게 하자. 그리고 영롱한 소리로 ‘까르르’ 웃게 하자. ‘R’ 발음이 별것인가. 말은 내가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통로다. 말의 끝은 ‘만남’이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과 삶,우주를 껴안는 일이다.

정화신(수필가)

2002/04/09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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