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이 작품 "1984년" 에서 선보였던 신조어 "new speak" 는 아직도 낡지 않은 어휘로 남아 있습니다.
새 밀레니엄에도 의연히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적 어휘라고 봅니다. "new speak" 란 독재자 빅 브라더(大兄) 가 기존 영어(old speak) 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공식언어를 말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단적 사고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려는 제도적 폭력의 장치이죠. 현재 우리 사회에도 공식언어가 분명 존재합니다.
단 강제적 폭력이 아니고, "자기 검열" 형태로 각자 마음 속에 똬리 틀고 있는 것이죠. 특히 신문.방송 같은 대중매체가 그럴 수밖에 없는데, 사회적 논의의 수위에 대한 암묵적인 틀이 있고, 대부분은 그 안에서 고만고만하고 순치(馴致) 된, 그저 얌전한 발언을 서로간에 주고받는 것이죠. 사회가 허용하는 통념 혹은 이데올로기란 여전히 위력적이고, 특히 대중사회 속에서는 허위의식, 자기만족 형태로 신념화됩니다.
건강한 논의를 위해 이 구조를 때론 깨줄 필요가 있고, 기자 역시 "눈에 안보이는 뉴 스피크" 를 허물고 싶어 근질근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참에 최근 문학동네에서 터진 "어퍼컷 한 방" 에 속이 다 후련해졌습니다.
평론가 조형준이 계간지 "세계의 문학" 겨울호에 기고한 "한국을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시키자는 겸손한 제안" (본지 12월 14일자 14면) 말입니다.
허황한 우리 사회 병리증후군(미국 콤플렉스) 에 대한 "불온한 똥침" 의 풍자가 바로 그 글이었다고 기자는 판단을 합니다.
그 평론을 "영어를 국어로 하자" 는 일본 메이지 시대 모리(森有禮) 의 발언과 동일시할 "거룩한 민족주의자" 는 없을 것입니다.
이 참에 선우휘의 단편소설이 생각났습니다. 하도 오래 전 기억이라 서울대 국문학과 김윤식 교수에게 확인했더니 애초 1965년 6월호 "세대" 에 발표됐었고, 제목은 "좌절의 복사(複寫)" 라고 일러주시더라고요. 대표작 "불꽃" 에 못미치는 이 작품이 지금도 생생한 것은 사회적 금기의 선을 넘기로 작심한 폭탄선언 때문입니다.
선우휘는 작중 화자(話者) 의 입을 빌려 한국인이야말로 2천년 전 이스라엘처럼 민족 전체가 풍비박산나는 엑소더스를 겪어야 한다고 일갈합니다.
현재의 한심한 시민의식과 정치 수준이란 통상적인 방식으론 도저히 치유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민족 전체가 해외로 흩어져 된통 고생을 해야 정신을 차릴 것이고, 그 기간은 수천년 이상이어야 한다고 독설을 쏟아냅니다.
신문기자로서는 보수 논객에 속했던 선우휘의 이런 의외의 발언을 못난 자학(自虐) 이라고 욕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가늠컨대 그건 픽션의 공간을 빌려 공식언어를 무시해본 모종의 실험이었을 겁니다. 왜 선우휘와 조형준의 우국충정이 남보다 덜하겠습니까□ 목불인견의 사회행태에 질렸던 것이겠지요. 조형준은 문제의 앞글에서 "강호제현들의 의견" 을 묻더라고요.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제 의견 한자락을 밝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