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른 이 149057067 명
  깁고 더함 2007/12/28
   
 
 
 
  교육, 학술
영어 안 섞으면 말못하는 지식인

누가 나에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다원성’이라 말할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하는 다원성은 민주주의 사회가 성장하는 토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음을 아는 태도,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태도는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데 바탕이 된다.

그러나 다원성이 보장된다고 해서 그 사회가 모두 민주주의 사회인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하기는 하지만 이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대화와 토론이 없다면 그 사회는 민주 사회가 되지 못한다. 그 사회는 갈등이 생겨도 해결할 수 없어 시민들이 더불어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들의 대화와 토론 능력을 높이는 것을 자국어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 읽기와 듣기를 통해 남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고, 말하기와 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는 일은 민주 사회의 버젓한 시민 구실을 하는 데 밑바탕을 이룬다.

그런데 읽기와 듣기, 말하기와 쓰기는 학창 시절에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풍부한 읽기를 통해 남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예절 바른 태도로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표현하는 일, 그리고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일은 특정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목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끊임없이 국어를 배워야 한다. 좋은 책을 많이 읽어 남의 의미 있는 생각을 꾸준히 접하고 정확하고 아름다운 단어나 문장을 계속 배워 가야 한다. 이는 우리 개인의 인격을 키우는 일일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며, 나아가 우리 사회의 국력을 키우는 일이다.

국어 교육은 민주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을 기르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국어를 잘 구사하면 국어로 표현되는 문화적 행위를 그만큼 잘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홍명희의 ‘임꺽정’에서 ‘잇다홍 무명 적삼에 갈매 무명 치마를 입었는데 매무새까지도 얌전하다’란 문장을 읽으며 ‘잇다홍’과 ‘갈매’란 단어를 배운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잇꽃’이나 ‘갈매나무’ 등 자연에 비겨 색깔을 가리켰음을 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맷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이란 구절이 있는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를 이해하고 설악산 십이선녀탕에서 보았던 물웅덩이의 신비롭고 짙은 초록색이 바로 ‘갈맷빛’임을 안다. 이 모두는 끊임없는 국어 교육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이요, 즐거움이다.

또 국어 교육은 우리의 전통을 이해하고 계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말과 글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우리 민족의 정신생활이 그 속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국어를 올바르게 배우고 익히는 것은 수천 년에 걸친 우리의 전통을 이어받는 일이요, 우리 민족문화의 진정한 발전을 꾀하는 일이다.

요즘은 좀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일수록 우리 말과 글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영어를 섞어 쓰지 않으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은 실정인 것이다.

그러나 국어에 대한 지식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바탕이 되고 우리 문화와 전통을 향유하고 계승하며 발전시키는 동력이 된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말과 글을 소중히 여기고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서 이 사회의 버젓한 시민으로서 우리의 문화를 향유하고 전통을 계승하는 데 앞장서야 할 때이다.

2004/10/12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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