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 숫자가 없어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하나·둘·셋·넷·… 들이 있긴 하나 이는 수를 세는 말이다.
서울 용산 효창공원에 백범 김구 선생 뫼가 있고, 백범기념관도 뫼터 옆에 들어섰다. ‘삼의사’나 임정 요인들의 뫼들도 주변에 있어 매운 얼·기운이 공원에 서려 드나드는 이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오래도록 백범 뫼만 홀로 있더니 1999년 부인 최준례님의 뼈도 중국 상해에서 모셔와 합장했다.
그 최준례 부인이 아들 인·신을 낳고 상해에서 일찍 타계했는데, 백범은 부인을 장사 지내고 빗돌을 세웠다. 그 빗돌에 이런 글을 새겼다.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최 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 빗돌이니 본디 세로로 새겼다. 요샛말로는 “4222년 3월19일 남/ 대한민국 6년 1월 1일 죽음/ 최 준례 무덤/ 남편 김구 세움”이 된다. 백범이 임시정부 내무총장 할 때다.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이 차례대로 ‘1·2·3·4·5·6·7·8·9·10’이다. 4222년은 ‘단기’이고 ‘대한민국 6년’은 1924년이다. 한글로만 새긴 마음씀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저리게 하는데, 그 빗돌은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가 있는 사이 없어졌다.(동아일보 1924년 2월18일치에 빗돌 사진 실림) 훈민정음을 만든 90여년 뒤 세운 한글 빗돌로, 1536년에 세운 서울 노원 하계동 이윤탁 무덤의 ‘영비’가 있다.(서울 유형문화재 제27호) 녕ㅎ.ㄴ비라 거운 사ㄹ.ㅁ.ㄴ ㅈ.ㅣ화ㄹ.ㄹ 니브리라 이ㄴ.ㄴ 글모ㄹ.ㄴ.ㄴ 사ㄹ.ㅁㄷ.려 알위노라 “영한 빗돌이라, 건드리는 사람은 재앙을 입으리라. 이는 글 모르는 사람더러 알림이라”로 옮길 수 있는데, 빗돌의 글씨는 ‘정음체’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