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우리의 제2언어로 규정하든 안하든 우리의 일상과 사회 속에서 이미 그렇게 기능한 지 오래다. 오히려
이에 대비한 어떤 원칙이 아무데도 없었기 때문에 우스꽝스런 언어 혼란이 곧잘 일어나고 있다.
휴대전화를 영국에서는 모바일
폰(mobile phone)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보통 핸드폰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핸드폰은 영어에 어원을 둔 한국어인 셈이다. 이 경우는
우리의 언어관습상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숯불갈비집이 어느 때부터인지 가든(garden)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암만 생각해도 우스꽝스럽다. 누군가가 옥외 숯불갈비집을 그렇게 유식하게 부르기 시작했는데 마침내 가든이 보통명사화해 곧 숯불갈비집을
지칭하는 언어로 된 것이다.
그 여파인지 요즘에는 여관을 파크(park)라고 쓴 곳이 많다. 처음엔 파크여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을 타다 이제는 아예 여관을 빼버리고 그냥 파크라고만 쓰고 있다. 결국 우리는 가든에서 고기 먹고 파크에서 잠을 잔다.
영어의
이런 기현상이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내 기억에 슈퍼마켓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어느새 가게를 슈퍼라고 칭하고
있다.
그런 예 중 가장 우스운 것은 비닐하우스가 그냥 하우스로 변해 버린 것이다. 모처럼 시골 외가에 놀러가서 형수에게 "형님
어디 계세요?" 하고 물었을 때 "하우스에서 거름주고 있어요" 라고 대답해 한참 어리둥절했던 때가 있다.
그런데 대학입시 시험감독에
들어갔다가 심심풀이로 실과시험 문제를 훑어보는데 "다음 중 하우스 작물(作物)이 아닌 것은?" 이라는 문제를 보았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비어(非語)가 급기야 교과서까지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든.파크.슈퍼.하우스.핸드폰도
우리말 사전에 올려야 할 것 같다.
영어가 이렇게 일상화.사회화하다 보니 문화유산답사 중에도
나는 재미있는 영어를 자주 대하게 된다. 계룡산의 한 절집에는 국제 선원(禪院)이 있다.
이 절집 선방 툇마루에는 항시 "조용히"라는 경고판이 국제선원답게 "사일런트(silent)"라고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다시 들렀더니 이 경고문이 "두 낫 디스터브(Do not
disturb)" 라고 바뀌어 있었다.
지금 참선 중이니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아마도 이 선사(禪師)는 외국호텔에서
손잡이에 걸어놓는 알림판에 "청소해 주십시오"라는 "메이크 업 플리즈(Make up please)" 뒷면에 이 글귀가 있는 것을 그렇게 원용한
것 같다.
또 남원 광한루에 갔을 때는 문화재 안내판에서 "춘향이가 수청을 들지 아니하여"라는 구절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했나
보았더니 "비코즈 오브 베드 서비스(because of bed service)"라고 번역해 놓았다. 얼마나 슬기로운 의역인가.
그런데 우리는 영어를 정작 사용할 데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문화재의 영문 명칭이다. 지금 외국인들은 뜻도
모른 채 "켱뽁쿵(KyungbokKung)" 하면서 그 어려운 받침발음을 하느라 고생을 하고 있다. 문화재, 특히 외국인이 많이 찾는 문화유적은
영어 이름을 따로 가져야 한다.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은 포비든 시티(Forbidden City)라고 부르고,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그레이트 월(Great Wall)이라고 병칭해 외국인들이 그 유물의 내용을 쉽게 기억하고 편하게 부르도록 하고 있다.
우리도 이런 슬기를 발휘할 때가 됐다. 예를 들어 창덕궁(昌德宮)은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 경복궁(景福宮)은 해피 팰리스(Happy Palace), 불국사(佛國寺)는 탬플 오브 파라다이스(Temple of Paradise)라는 식으로 병칭해 주어야 한다.
정부는 이제 한글의 외래어 표기법을 음가(音價)대로 현실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이와 아울러 외국인들이 뜻도 이해하며 정겹게 부를 수 있는 문화재의 영문 이름표 작업도 해주었으면 정말로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