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정지용의 ‘향수’ 중에서) 소리나는 대로 고스란히 옮겨쓰는 한글이 아니었더라면, 이 아름다운 시도 제 모습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글은 단 28개의 자모를 가지고 무려 1만1172개의 음절을 만들 수 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소리뿐 아니라 자연계의 거의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완벽한 글자’다.
신생 국가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은 야심만만한 젊은 군주였다. 위로 두 형을 제치고 보좌에 오른 그는 조선의 기틀을 잡는 여러 작업 중 한글 창제에 유독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한자 교양을 바탕으로 한 유학자들의 거부감이 컸고 세종의 개혁 싱크 탱크라 할 집현전에서도 반대가 적잖았지만, 세종은 민족 국가 건설과 왕권 강화라는 통치 이념의 상징으로 한글을 적극 내세웠다.
1926년 일제 강점하에서 조선어연구회가 가갸날이란 이름으로 한글날을 처음 기념한 지 어언 77년이 지났다. 지금 지구상에는 6700여종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우리처럼 고유 언어와 문자를 가진 민족은 손꼽을 정도다. 그러나 분단은 한글날도 남북으로 나누어 놓았다. 반포일을 기준한 우리 한글날과 달리 북한은 창제(완성)일을 양력으로 환산, 1월 15일을 기념한다.
인류 최대의 발명이란 말을 듣는 한글은 요즘 상처 투성이다. 파괴의 두 주역은 컴퓨터와 텔레비전이다. 무한대에 가까운 표기 능력이 오히려 덫이 된 것일까. 뭐가 뭔지 모를 것을 일러 ‘아??’이라고 하더니, 요즘은 ‘냉텅’(내용 텅 비었음) ‘윽~ 즐!’(왝, 그만!) 같은 괴상한 조어가 난무한다. 더 심각한 것은 텔레비전으로, ‘이렇게 기뿔 때가!’ ‘귀여운 girl(걸)’이란 자막이 부끄럼도 없이 등장한다.
우리 말에 글과 표기법을 찾아줌으로써 새로운 나라 건설을 꿈꾸었던 세종이 오늘의 우리 말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작품이 문학사에 남는 것은 이야기뿐 아니라 그 아름다운 말과 글 때문이다. 한글을 물려준 세종대왕에게 우리가 은혜를 갚는 길은 우리의 셰익스피어나 괴테가 출현, 물려받은 언어를 보다 아름답고 정확하고 풍부하게 다듬어 나가는 것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