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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른 이 156000252 명
깁고 더함 200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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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과 3000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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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에 관한 일본의 기록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첫 번째 의문은 왜 일본 사람들은 백제(百濟)라고 쓰고 이를 구다라(くだら)라고 읽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일본의 고유명사는 지은 사람 마음대로 읽는다고 하지만 백제(百濟)는 구다라로 읽힐 수 없는 음운이다.
더구나 ‘구라다나이(くだらない·백제가 없다)’라고 쓰고서 ‘시시하다’는 뜻으로 쓰는 것은 더욱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저런 의문도 있고 또 백제 문화에 대한 공부도 할 겸 나는 지난해 부여(扶餘) 일대의 여행에 나섰다.
그런데 ‘구다라’에 대한 의문은 백마강(白馬江) 나루터에서 금새 풀
렸다.
백제 시대에 일본으로 배가 떠나던 나루터 마을의 옛 지명이 ‘구드레
’였다.
지금도 이 지역의 촌로들은 그 마을을 ‘구드레’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학이란 천장만 쳐다보고 쓸 수는 없는 것이요, 책만 갖고 되는 일
도 아니며, 다리품 파는 작업이란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진작 현장을 돌아보지 못하고 책상머리에 앉아 고민만 하던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부끄러움이 머리를 스쳐갔다.
부여에 온 김에 낙화암(落花巖)과 고란사(皐蘭寺)를 빼놓을 수가 없어 발길을 그 곳으로 돌렸다. 이 곳에 대해 나는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낙화암과 3000 궁녀의 전설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낙화암을 돌아보면서 나는 역사가 잘못 전해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이곳 어디에 3000명의 여자가 통곡하며 줄을 서서 뛰어내릴 만 한 공간이 있는가?
의자왕(義慈王)은 망국의 군주였다는 점에서 어느 모로도 미화될 수 없는 인물이다. 절대 군주 시대에 나라를 잃는 것은 결국 그 시대 최고 지배자인 군주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보통 남자)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는 고염무(顧炎武)의 말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일이며, 그 시대의 지배 계급이야말로 흥망의 일차적 책임자이다. 그런 점에서 의자왕이나 경순왕(敬順王) 공양왕(恭讓王) 순종황제(純宗皇帝) 모두가 역사에 책임이 무거운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 같은 역사의 문책이 정도를 지나치는 것은 결코 온당한 필법(筆法)이라고 할 수 없다. 의자왕의 경우가 그렇다. 우선 3000 궁녀 얘기만 해도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총 호구 수는 76만호였으며, 총인구는 620만 명 정도였다.
이 통계를 보면서 독자들은 놀랄 것이다. 우리가 백제의 옛 땅이라고
알고 있는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의 현재 총 호구 수가 170만 호에 인구가 574만 명인데 1400년 전 백제 인구가 지금보다 많았다는 점이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역사적 논쟁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백제의 영토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가 아니라 보다 방대한 해상 강국이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또 다른 주제이므로 여기에서 더 이상 소상하게 다룰 수가 없다.)
백제가 멸망하던 날, 궁녀들이 백마강에 투신 자살한 것은 사실로 확인이 된다. 심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의 기록에 의하면, 그 날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전한다.(‘삼국유사’권1 태종 춘추공 조)
후 고려 시대에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1298∼1351)이 부여를 돌아보고 ‘하루 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니 천 척의 푸른 바위가 이름하여 낙화암이러라(一日金城如解瓦 千尺翠巖名落花)’라 시를 짓고,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이존오(李存吾·1341∼1371)가 ‘낙화암 밑의 물결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 년을 속절없이 떠도누나(落花巖下波浩蕩 白雲千載空悠然)’라는 시를 지은 것을 보면 고려 시대에 이미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백성들의 과음(過飮)이 심해지자 세종대왕께서 “신라가 망한 것이 포석정(鮑石亭)의 술판 때문이었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멸망한 것이 모두 술 때문이었으니 백성들은 과음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것(‘세종실록’ 15년 10월 28일 정축 조)으로 보아 이 때 이미 낙화암이라는 말이 흔히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동국여지승람’(권18 충청도 부여 편·1481)에 이 곳의 지명이 공식적으로 낙화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투신 자살했던 궁녀들의 숫자는 나오지 않는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패망할 당시 수도인 부여에는 총 1만 가구가 살았으니 인구는 4만5000명 정도였으며, 2500명의 군대가 있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인구 4만5000명에 군대는 2500명이었던 도성에서 3000명의 궁녀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 당시의 농업 생산력이나 주거 공간을 감안할 때 과연 가능했을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부여의 인구가 9만5000명인데 현재의 도시 능력으로도 궁녀 3000
명을 거느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부여 어디에 3000명을 수용할 주거 공간이 있는가.
그렇다면 ‘3000 궁녀’라는 말은 누가 먼저 했을까. 어떠한 1차 사료
로도 궁녀가 3000 명이었고 그들이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다. 안정복(安鼎福)의 기록(‘동사강목’ 권2 경신년 추 7월 조)에 따르면 ‘여러 비빈들(諸姬)’이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내가 과문한 탓이라고 생각되지만, 3000 궁녀가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
했다는 글을 처음 읽은 것은 일제 시대에 나온 윤승한(尹昇漢)의 소설 ‘김유신’(金庾信·야담사·1941)이었다. 그에 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아마도 이홍직(李弘稙)의 ‘국사대사전’(지문각·1962)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홍직이 3000 궁녀의 첫 발설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3000 궁녀 얘기는 있었다. 이홍직은 참고 문헌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적어놓았으나 그 책에는 그런 얘기가 없다. 아마도 구전을 그렇게 정리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런 얘기와 함께 의자왕의 평소 공적이나 행실을 비교해 보노라면 나
는 의자왕에 대해 일종의 연민을 느낀다.
그는 무왕(武王)의 아들로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해 해동증자(海東曾子)의 칭호를 들었다. 집권 초기에는 국력이 부강해 신라를 제압했고,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과 같은 충신이 있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다만 자식의 죽음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에 의
해 이뤄진 나당연합군의 정복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었다. 결국 재위 20년만인 서기 660년 전쟁에서 패한 그는 중국으로 끌려가 그 해에 죽어 망국의 제후들이 묻히는 망산(芒山)에 매장됐다.
요컨대 의자왕과 낙화암에 관한 역사는 허구이다. 그에 관한 어떤 일차 사료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일제시대 식민지 사학자들이 백제를 비하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의자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주색에 빠져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하지 않음)했고, 궁녀 3000명을 데리고 살았다는 식으로 역사를 곡필했으며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자료로 그를 인신 공격했다. 그런 점에서 의자왕도 이 나라 역사의 한 원혼이 되어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신복룡(건국대교수·정치외교사)
2001/05/25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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