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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깁고 더함 2007/12/28
   
 
 
 
  교육, 학술
한국어의 자살

왕조시대에 중국에서 온 사신(使臣)을 임금이 접견하는 자리에는 통역을 맡은 통사(通事=통역)가 있게 마련이었다. 조선 성종 18년(1487년) 중국 명(明)나라 황제 헌종(憲宗)이 죽고, 효종(孝宗)이 즉위했을 때의 일이다.

이듬해에 명나라는 효종의 즉위를 알리는 사신 동월(董越)을 보내왔다. 그는 서울에서 열흘동안 묵으면서 겪은 일들을 엮어 성종 21년(1490년) ‘조선부(朝鮮賦)’라는 이름의 책을 냈다. 그는 성종 임금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통역을 빌어 말을 했다”고 적었다. 이때 통역은 통사 장유성(張有誠)과 이승지였다 한다.

동월이 돌아가기 전날 성종 임금은 그에게 술을 권하면서 말했다. “내일이면 하늘과 깊은 못처럼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해서 “천연(天淵)의 거리”라고 했다. 그러나 통역은 ‘천연’을 ‘하늘처럼 멀다’는 뜻으로 “천원(天遠)”이라고 했다. 다행이 동월은 그 말이 잘못됐다고 바로 잡아 줬다. 왕조시대 임금의 말을 옮겨 전하는 통사도 중국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동월은 이때의 일을 적으면서 “장유성은 중국말을 잘 하지만 글을 읽은 게 적고, 이승지는 글을 많이 읽었지만 중국말에 익숙지 못해 통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조선시대에 역관(譯官)은 양반이 아닌 중인(中人)신분이었다. 과거시험도 양반은 문과에 급제해야했지만 역관이 치러야하는 역과는 잡과(雜科)라 해서 격이 낮은 것이었다.

중국어 배우지 않는 전통

그러나 실제로 공부해야하는 내용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성종 13년(1482년) 역과 출신도 문과출신과 같은 기준으로 벼슬을 주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 주장은 문신들의 반대로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고려시대 이래 중국에 유학한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지만, 중국사람과는 말이 아니라 글씨로 얘기를 나누는 필담(筆談)으로 통하게 마련이었다. 중국말 하기를 꺼리는 것은 뿌리깊은 전통이었다.

그것은 동북아 천하가 중국의 패권에 의해 호령되던 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전통이자, 자존심이었다. 그처럼 끈질긴 우리의 전통이 1990년대 김영삼 정부이래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10년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아침·저녁으로 ‘세계화’를 노래했을 때 신문·방송들은 뒤질세라 영어·영문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그야말로 일제의 조선어학회탄압(1942년)이래 최악의 국어위기요, 한글의 위기였다(1997년 3월24일자) ‘몰지각한 영어·영문홍수’ 제하의 본란). 그것은 영어공용어론과 맞물린 국어의 위기였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노래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10년, 그 뒤를 받아 이 나라를 휩쓸었던 영어공용어론이 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살아났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지난 20일 내놓은 내년부터 5년 동안 ‘정책과제 로드맵’은 인천, 부산·진해, 광양 등 3개 경제특구와 제주도(국제 자유도시)에서 영어를 공용으로 쓰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영어공용어 정책, 모국어 위협

이들 4개 지역 초등학교에서는 내년부터 수학·과학 등을 영어로만 가르치고, 공공기관의 문서와 간행물을 국어와 영어로 만들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영어가 경쟁력”이라고 나팔을 불고 있는 신흥종교가 드디어 이 땅에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이 신흥종교의 전도사들은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인도나 필리핀이 제3세계에서도 경쟁력이 뒤지는 나라임을 모르고 있다.

이들은 또 1975년 ‘언어법’을 만들어 상품의 표시나 선전에는 반드시 프랑스말을 쓰되, 위반하는 상품이나 기업을 제재하고 있는 프랑스가 세계의 선진국임을 모르고 있다.

또 이들은 25개 회원국을 거느린 유럽연합(EU)이 자그마치 20개의 공용어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1985년 엘리제궁에서 열린 국어문제 최고위원회 첫 회의에서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은 경고했다. “ 이 세상에서 자기네 언어를 잃어버린 민족에게 귀를 기울일 사람은 없다”고.

또 유네스코는 3년 전 “세계의 6천여 언어 중 절반이 사라질 위기 앞에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었다(2000년2월21일). 영국의 빌 서덜런드 교수도 2년 전 “지구상의 언어 6809개중 6천 개 이상이 소멸위기에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었다.

만일 그가 오늘날 한국의 영어공용어 정책에 접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가운데 한국어는 소멸한 게 아니라, 영어공용어정책으로 자살했다”고.

사대주의시대에도 모국어를 지켰던 당당한 자긍심 앞에서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2005/10/27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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