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무?(무릎)에 노앗습니다(놓았습니다).` `그레서(그래서) 베(배)보다 바나나가 헐씬(훨씬) 조았다(좋았다).` `질문:~을 알 수 있는가? 답:당근.`(서울 A초등학교 5학년 시험답안 중에서)
한글 맞춤법이 학교에서부터 뿌리째 무너지고 있다.
컴퓨터 사용인구 급증으로 실생활과 온라인(on-line)상 언어의 괴리로, 우리말 왜곡이 사회문제화한지는 이미 오래전. 그러나 이런 현상이 방치돼 온 사이 처음 한글을 깨우치는 초등학생들이 부정확한 맞춤법에 그대로 적응하거나, 심지어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맞춤법 경시풍조까지 확산되는 등 문제가 날로 심화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문화적 규범인 맞춤법의 혼란에 따른 사회 갈등 소지마저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서울 K초등교 6학년 담임 김혜옥(金惠玉ㆍ42) 교사는 "고학년에서도 정확한 맞춤법을 구사하는 아이가 전체 인원의 절반 이하"라며 "문제를 지적하면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까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을 만큼 문제가 심각하다"고 전했다.
교사경력 20년째인 이종탁(李鍾卓ㆍ42ㆍ서울 G초교)씨는 "아직 보편화한 현상은 아니지만 자기들끼리 쓰는 잘못된 용어를 맞는 줄 알고 있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며 "이런식으로 가다간 정확한 맞춤법이나 품격있는 우리말 표현은 학술용어로나 쓰이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라고 답답해 했다.
서울 모 초등교 구모(46)교사도 "한글 틀리는 건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간혹 영어단어 하나 틀리면 큰일 난 것처럼 반응하는 학부모들의 이중적 태도도 문제"라며 "맞춤법 경시의 정확한 이유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영어교육 과열 풍조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초등학생들 태반이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인다. 서울 K초등학교 김찬울(13)군은 "맞춤법을 알지만 `우리들의 언어`를 쓰지않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고 말했고, 정모(13ㆍ서울 B초교)군은 "선생님도 웃어 넘길 뿐, 잘 지적하지 않아 틀린 맞춤법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 학부모 양희경(梁喜炅ㆍ38ㆍ서울 송파구 가락동)씨는 "컴퓨터가 알아서 틀린 대목을 고쳐주는데, 굳이 어려운 맞춤법에 매달리느니 다른 공부에 투자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김모(41)씨는 "잘못 쓴 받침을 지적하다 `이렇게 써도 된다`고 항변하는 아이와 다툰 적도 있다"고 기막혀 했다.
국립국어연구원 규범부장 김광해(金光海) 서울대교수는 "컴퓨터 상의 `입말`을 쓰는 현상이 보편화해 있으나 솔직히 현실적인 대책은 없는 상태"라며 "맞춤법은 어원 분석을 통해 나온 과학적 결과인만큼 문화적 규준(規準)의 차원에서 지켜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어학당에서 수십년간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지도해 온 백봉자(白峰子) 국제한국어교육학회장은 "실생활의 언어사용 과정에서 잘못 굳어진 경우는 더욱 고치기 어렵다"며 "언어의 혼란은 정상적 사회질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