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공용 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한글날에 공포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이다. 두 문장으로 구성된 법률 제6호로서 공포된 순서로만 보자면 수천개에 달하는 현행 법령 가운데 맏형격에 들어가지만 철저히 무시를 당했다. 정부와 국회는 관행적으로 각종 법조문에 한자를 남발하기 일쑤였고, 한자가 우리 법령의 주인 행세를 해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정부와 국회가 스스로 법을 어겨왔던 셈이다.
더구나 법령의 이름은 아무리 길어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관행도 계속됐다. 이러다보니 제목만 무려 83음절에 달하지만 단 한번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대한민국과아메리카합중국간의…국가및지방자치단체의재산의관리와처분에관한법률’(법률 제5454호) 같은 법도 있다. 심지어 1963년까지는 법조문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어에는 띄어쓰기가 없다는 점을 안다면 이런 해괴한 관행이 어디서 유래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부는 지난 21일 국무회의에서 내년 한글날을 기점으로 몇개 법령을 제외한 모든 현행 법령의 조문을 한글로 바꾸기 위한 특별법을 의결했다.
법제처는 내년 1월1일부터 제정·개정되는 모든 법령의 이름에 띄어쓰기를 실시하겠다고 22일 밝혔다. 정부가 수립된 지 반세기 하고도 7년이 지나서야 법조문의 주인이 한자와 일본식에서 한글로 바뀌는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찜찜한 구석이 남는다. 언제부턴가 정부 공문과 공직자들의 말에서 영문이 등장하는 빈도가 높아지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