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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깁고 더함 2007/12/28
   
 
 
 
  어휘 풀이
미래가 보이는 마당


[이어령의 미래가 보이는 마당]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후일 그때에 잊었노라" . - 김소월의 시 먼 후일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상한 것은 오늘도 어제도 모두가 다 순수한 우리말인데 미래를 나타내는 후일(後日)만은 한자말로 돼 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가장 많이 쓰는 `내일(來日)` 이란 말도 한자말이다. 분명 우리에게도 내일이라는 고유한 말이 있었을 터인데 언제 어떻게 해서 그것을 잃게 됐는지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말은 생각의 집" 이라고 한다. 내일의 생각이 살 집을 잃었으니 한국인의 미래는 셋방살이를 할 도리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나라의 번영과 영원을 다짐하는 애국가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다.

미래는 고갈하고 마멸하는 소멸의 시간 속에서 전개된다. "작은 모래알이 큰 바위가 되도록 영원하라" 는 일본의 기미가요(국가)와 비교해 보면 왜 우리가 침략을 당했는지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이라고 달라진 것이 없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잘 쓰는 `전향적` 이라는 말 역시 `마에무키(前向)` 라는 일본어에서 빌려온 말이다. 이러한 `미래 음치` 때문에 우리는 꿈이라는 좋은 말을 두고도 비전이라는 영어를 써야 한다.

"꿈" 이라고 하면 "깨라" 라는 말이 따라오고 "꿈자리" 라고 하면 "사납다" 라는 말이 붙어다니기 때문이다. 개혁은 분명 내일의 꿈인데도 실상은 과거를 향해 눈 흘기고 주먹질 하는 한풀이의 잔치였다. 그래서 온 국민의 꿈은 가위에 눌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과연 한국인은 내일을 잃은 민족인가. 아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모레` 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일은 한자말이지만 그 보다 더 먼 미래를 뜻하는 모레는 순수한 우리 토박이 말이다. 모레뿐인가. 글피도 그글피도 모두가 우리 고유어다. 그냥 고유어만이 아니다.

세상에 그 많은 말이 있어도 글피에 그글피까지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는 없을 것 같다. 멀리 앞을 내다본다는 중국 사람들도 글피에 해당하는 다허우톈(大後天)이란 말은 있어도 그글피라는 말은 찾아볼 수가 없다.

같은 불교라도 한국에 들어오면 미륵신앙으로 변한다. 미륵보살은 석가가 입멸한 뒤 56억7천만년 뒤에 미륵불로 세상에 태어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 불이다. 미래를 생각할 줄 모르는 민족이었다면 어떻게 그렇게도 멀고 먼 미래의 부처님을 믿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눈 앞의 부처님을 놓아두고 미래의 부처가 될 미륵보살을 믿으려 했겠는가. 그래서 한국인은 천년 앞을 생각하면서 냇물과 바다가 만나는 포구에 향나무를 묻어 미래를 기원했다. 그것이 바로 천년이 지난 오늘 날 이곳 저곳에서 발굴되는 침향이요, 매향비(埋香碑)인 것이다.

이렇게 `내일은 없어도 모레는 있는 민족` 이 바로 우리 한국인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한 세기가 바로 그랬다. 개인이든 나라든 내일의 기상예보는 언제나 불안의 먹구름이었고 위기설의 안개였고 위협의 폭풍이었다.

우리 어머니들은 그럴 때마다 미숫가루를 만드느라 날을 지샌다. 통조림을 발명한 나폴레옹처럼 남들은 공격하기 위해 보존식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도망치기 위해 피난식을 만들었다. 그것이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미숫가루 문화요 흰떡과 누룽지의 식문화다.

힐티는 행복한 삶을 정의하여 아침에 기쁜 마음으로 눈을 뜨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날 새는 것을 두려워하며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기에 "날 샜다" 라는 말이 일을 그르쳐 희망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지 않았는가. 아침의 나라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도둑이 아닌데도 어째서 우리는 `날 새는 것` 을 그처럼 두려워해야만 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내일이란 말을 잃게 된 연유와 그러면서도 모레와 글피 그글피의 말을 소중히 간직해 온 단서를 찾게 된다. 내일은 막혀 있었지만 모레는 항상 트여 있었고 글피와 그글피는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늘 망한다, 망한다고 하면서 조금씩 부흥해 왔고 굶는다, 굶는다 하면서도 허리띠를 풀고 살아갈 수 있는 경제발전을 해왔다. 내일이라는 근 미래에 대한 위기가 모레라는 원 미래의 끈질긴 희원을 낳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일` 을 우리말로 무엇이라고 했는지의 궁금증도 풀리게 된다.

아직은 추리단계이기는 하지만 `내일` 의 순수한 한국말은 `날새` 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이영희). 일본 말 가운데는 옛날 우리말이 화석처럼 굳어 있는 것들이 많다. 삼한시대 한국인들이 일본 땅으로 건너가 그 문화의 꽃을 피운 땅 이름 아스카(飛鳥)도 그 중의 하나다. `아스` 는 일본말로 내일(明日)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스카의 지명을 `명일 향(明日香)` 이라고 쓰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일본 학자들은 누구하나 아스카를 비조라고도 하고 `명일 향` 이라고도 부르는지 그 연관성에 대해 속시원한 풀이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말로 새겨보면 금세 그 수수께끼가 풀린다. 비조는 날 비(飛), 새 조(鳥)로 `날새` 가 된다. 그리고 명일 향의 그 明日은 날(日)이 샌다(明)로 `날새` (飛鳥)와 똑같은 말이다.

그리고 香은 일본말로 `가오리` 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리골이라고 할 때처럼 지명 끝에 잘 붙어다니는 한국말의 `골(고을)` 과 음이 같다. 그러니까 `날새 골` 의 의미를 한자와 일본어음으로 표기하면 명일향이 되고 그 음을 한자 뜻으로 바꿔놓으면 비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추리해 보면 내일을 뜻하는 한국말은 날새였으며 그 뜻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명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자의 본 고장인 중국에서는 내일이나 명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밍톈(明天), 밍얼(明兒)이라고 한다.

일본사람들이 절대로 풀 수 없었던 명일향=비조의 등식만이 아니라 일본문화의 시원지인 아스카를 세운 백제인을 비롯한 고구려.신라인들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마치 미국으로 건너가 신천지를 개척한 유럽 사람들처럼 한국인은 일본 땅에 `내일의 고을` `미래의 땅` 을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나라 잃은 백제의 유민들에게 있어서 한국 땅에서의 날새(명일)는 절망이었지만 일본 땅의 날새는 희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일은 없어도 모레는 있는 `코리안 드림` 의 이민문화는 현재에도 그대로 살아 있다. 한국은 이 지구상에서 인구당 비율로 이민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인 것이다.

중국.러시아.일본, 그리고 광복 후에는 미국.유럽.아프리카의 세계 어느 구석에도 한국인이 살지 않는 곳이란 없다. 그것을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 문화학자들이 그레이트 저니(대여행)라고 부르는 몽골로이드의 문화적 원형에 이른다.

니그로이드와 코카소이드(백인)들이 제자리에 멈춰 살 때 중앙아시아의 산맥과 시베리아의 동토대를 횡단해 한반도에 이른 사람들이 바로 몽골로이드다. 그리고 그 대행진은 미국대륙으로 뻗어간다. 내일이 없기에 그 고통을 넘어 모레와 글피와 그글피의 땅을 찾아 목숨을 건 희망의 대행진을 펼친 것이다.

내일은 없고 모레는 있는 한국 문화의 날새 문화의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판소리 `심청전` 이다.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판 심청은 그 약정한 날이 내일로 다가오자 이렇게 노래한다. "닭아 닭아 우지 마라 - 네가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 죽는다" . 이 절박한 노래가 한국인의 날새 문화 - 내일 없는 문화였다. 닭의 울음은 새벽을 알리는 희망의 소리가 아니라 죽음을 예고하는 곡소리다. 여명이 칠흑의 삼경보다 더 어두운 세계다.

그러나 심청이에게 있어 인당수에 빠지는 내일의 죽음은 모레의 용궁이요 글피의 심황후다. 그리고 그 글피는 그녀의 비원인 아버지가 눈뜨는 날이다.

눈부신 아침을 되찾는 문자 그대로 개안의 날이요 광복의 날이다. 심청은 공양미 삼백석을 불전에 시주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인당수의 제물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까운 미래에는 결코 눈을 뜰 수 없다는 가혹한 현실의 논리를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심황후가 된 심청이 맹인잔치를 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믿음대로라면 아버지는 벌써 눈을 떠 이미 장님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청이의 모순 - 불력이라는 먼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와 근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현실주의 - 그 두 개의 믿음 사이에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와 맹인 잔치를 여는 심청이의 두 가지 다른 내면의 드라마가 전개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심청이와 같은 모순하는 두 믿음과 미래관을 지니고 한국인은 오늘 여기까지 살아왔다. 내일은 없어도 모레는 있다는 근 미래의 절망과 원 미래의 희망을 안고 앞으로의 천년을 향해 몽골로이드의 그레이트 저니는 계속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는 21세기의 날샘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모레와 글피는 어디에 있는가. 가위 눌려 꿈자리가 사나운 사람들을 위해서 여기 `미래가 보이는 마당` 을 열고자 한다. 그것은 날이 새기 전 한국 혼을 찾는 굿판이 될 것이며 아직 우리가 다 부르지 못한 판소리 심청이의 열두 마당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2001/07/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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