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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깁고 더함 2007/12/28
   
 
 
 
  언어, 사회 현상
국문학박사도 잘 모르는 단어들
“엄마! 왜 거품이 안 나?” 아이의 말에 엄마가 들여다보았더니 초등학생 딸아이가 샴푸를 발에 바른 채 문지르고 있었다. ‘샴푸를 두발에 바르고 문지르면 거품이 생깁니다.’ 샴푸 용기에 쓰인 글귀가 원인이다. 필자의 딸아이 친구이자 외국에서 1년 반 정도 생활하다가 온 5학년짜리 여자아이 이야기인데 얼마 전 지방의 라디오 방송에서 쉬운 말 쓰기 캠페인 방송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머리카락을 두고 두발이라 했다가 생긴 일이었다.

유난히 더웠던 올 여름 휴가길에서 고속도로 변에 ‘암거수로’란 표지판이 있는 걸 보았다. 암거수로. 슬쩍 아내에게 물어 보았더니 모른단다. ‘암거(暗渠)’는 일본식 한자어인데 땅속에 묻은 도랑이라는 어려운 말이다. 명색이 문학박사라도 이런 말을 알기 쉽지 않다.

초등학생이든 박사든 어려운 말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언어의 중요한 한 기능이 의사소통이라면 이것은 분명 비효율적인 일이다. 국어순화는 이래서 필요하다. 고유어가 아닌 한자어라서 멀리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말 대신 좀 알아듣기 쉬운 말을 쓰자는 것이다. ‘두발’은 ‘머리’로 ‘암거수로’는 ‘땅속 도랑’으로 쓰면 더 이해하기 쉽다. 이렇게 좀더 쉬운 말로 고쳐 쓰는 일을 보통 국어순화라고 부른다.

흔히 국어순화라고 하면 단어만 생각하기 쉽다. 특히 새 단어를 만드는 일을 주로 떠올리기 십상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비행기’를 ‘날틀’로 고쳤던 일은 유명한 사례로 남아 있으며 근래의 것으로는 ‘노견’을 ‘갓길’로 바꾼 좋은 예가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도 큰 잘못은 없고 또 그런 생각에는 이유도 있다. 일찍이 주시경 선생이 국어학 용어 등 여러 말을 고유어로 바꾸는 노력을 했고, 광복 후에는 일본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간즈메’를 ‘통조림’으로 고친 예처럼 아무래도 어휘에 가장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 문교부의 국어순화 세칙에서도 우선적으로 어휘 분야를 순화한다고 했고 그 이후 국어 정책에서도 순화는 거의 대부분 어휘에 집중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국어순화는 이와 같이 어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발음이나 문장 등 우리말을 사용하는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주변을 돌아보라.

얼마나 다양하고 제각각인 발음들이 떠다니고 있는지. ‘밭이’의 발음은 ‘바시’도 있고, ‘바티’도 있고, ‘바치’도 있다. 그럭저럭 알아듣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10년이 넘도록 국어 교육에 투자한 결과치고는 초라하다. 지식인이 쓴 글에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허다한 경우가 있다. 이렇게 잘못된 발음도 순화의 대상이요,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도 순화의 대상이다.

경어법에 어긋난 말도 역시 순화의 대상이다. 이를테면 요즘 학생들은 ‘여쭈다’라는 말을 거의 모른다. 대부분 ‘물어볼 게 있어요’라고 말한다. 언어 예절에 어긋나는 말은 듣기에도 유쾌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 말은 당연히 순화의 대상이 된다.

흔히 욕설이나 비속어를 마구 섞어 쓰면 ‘국어순화 좀 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하는데 ‘국어순화’의 의미에 딱 맞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국어순화의 영역은 참 넓다. 국어를 제대로 쓰는 활동이라면 모두 국어순화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역시 어휘의 순화가 국어순화의 가장 기초이므로 이것부터 관심을 기울여 차근차근 순화해 나갈 필요도 있다. 근래 국립국어연구원에서 ‘웰빙’을 ‘참살이’라는 좋은 말로 순화한 것도 그런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이렇게 우리말을 순화하는 것은 태초의 국어의 모습, 그러니까 외래어에 물들지 않은 본연의 순수함을 찾자는 거창한 일이 아니다. 오랜 기간 풍상을 겪으며 오늘날 자리 잡고 있는 이 국어를 항상 씻어 주고 닦아 주면서 사용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국어를 사용하면서 적게든 많게든 국어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좀더 공손한 마음으로, 좀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말을 대하면 좋지 않을까?

〈허철구/ 청원대 교수〉

2004/08/17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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